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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방 후원분
국내의 전방 후원분
?본인은 고고학을 전공했던 사람이고 아직도 ㅈㄴ게 궁금함 이 무덤이 어떤의미일지..
?전방후원분은 일본 고훈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임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걸치는 시대)
?헌디 이 일본식 무덤이 우리나라에 서해일부와 전라도 지방에서 발견이 됨
왜지???
?근데 심지어 무덤구조의 변화상으로 볼때 국내전방후원분이 일본보다 빠른편도 아님
즉 전방후원분 자체도 일본이 형식상 빠른 시기고 우리나라 전방후원분은 그 후행하던 무덤이다. 그니까 3단계로 쉽게 나누었을때 출현 -절정 -퇴보 시기에서 우리나라의 무덤은 절정시기정도에 해당하는 무덤이란 뜻
?그리고 내부 구조나 무덤내 출토품 또한 일본식임..
?다들 마한이 근초고왕대 점령됐다라고 배웠을텐데 적어도 지금의 전라까지 영향력이 증대된 것은 사비시대 들어서고 고고학적으론 전라도 마한세력권은 백제와 문화가 차이가 나는데 묘제나 왕관 토기 등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음?
?그렇지만 백제의 영향속에서 간접지배를 당한 양상으로 파악되지만 6세기나 되서야 백제의 실질적인 전라지방 직접지배를 보이는 편이 지금 고고학적 학계결론이구 이 관점을 보고 다시 생각하면
가능성 1. 일본의 임나부일본설 가능성에 대한 내용?
?머 다 아는내용임 중국사서기록에 일본에 백제가 포로를 보내고 어쩌고 실제로 수서엔 왜인전에 왜국을 백제 신라가 대국으로 본다는 대목이 있음 임나부일본설 기타 광개토대왕릉비 해석내용 일본서기 등
반박 : but 당시 긴박한 상황 유독 수서에 이런기록은 임나부보단 당시 백제는 한강을 신라에 뺏기고 계속밀어 붙이던 시기 신라와 백제의 상황 속 백제와 신라의 친 왜 노선의 왜 포섭 줄타기로 인한 조공물과 인질교환에 대한 내용이지 왜>>>백제, 신라로 볼 순 없으며 또한 광개토대왕릉비 해석은 어째됐건 고구려인지 왜인지에 대한 해석에 대해 주체를 어디로 볼 것이냐는 해석의 차이가 생김
?결정적으로 일본인이 지배를 했다면 관방유적이라던가 집단을 이룬 흔적이 구체적이지 못함
?그리고 일본서기에서 밝히는 연대와 너무 많이 차이남
?아래는 그냥 내 생각임..? 병신같은 뇌피셜임
2. 파견(본인생각)
?일본 천황실이 백제와 연관이 있는 만큼 백제와 연관있는 일본의 주요한 인사들이 백제의 간접지배구역인 마한지역에서 관직을 받아 일을 했으며 거기서 죽은 사람을 위해 그 나라의 방식대로 무덤을 지어준 것
3. 마한인들과 일본인의 관계(본인생각)
?송국리라고 유명한 부여의 청동기 유적이 일본의 야요이시대 때 영향을 끼쳤음 그 이후로 마한과 교류와 교역 이주로 인한 커넥션이 지속되어 이런 결과가 계속 이어진 것이 아닌가? 거기다 주구묘가 진화된 것이 전방후원분이라 주구묘가 전방후원분의 원형이라고 추정하는데 일본과 한국에서 주구묘가 제일빠른게 국내에서 발견 됨?
?머 물론 지금은 고고학이랑 관련있는 일은 안하지만 ㅋㅋㅋ 그냥 끄적여 봄 혹시 이 분야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있거나 원광 전북대 고고학도들은 최근 연구성과 좀 알려주시길ㅎㅎ 하도 배운지 오래되서 제대로 적었나 모르겠네
댓글(45)
대체로 백제가 마한 재지세력들 제압하는 과정에서 일부 일본세력의 도움을 받고 그 대가로 일부 일본인들에게 봉토를 하사한 것 정도로 보던데
ㅈㅍㅇㅁㄹ 근데 소위 말하는 일뽕들이 전방후원분 규모로 지랄하는건 진짜 무의미한게 일본 현덕왕릉은 동시기 중국 황제무덤보다 규모가 큼. 그냥 당대 일본이 중앙집권이 약해서 왕이 권위세울려면 무덤을 과시적으로 크게 만들 수 밖에 없었던 환경이 작용했다더라. 반면에 한반도 국가들은 어느정도 왕권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어느시점부터는 규모를 늘릴필요가 없어졌고
ㅈㅍㅇㅁㄹ 규모는 좀 막상 커도 부장품은 별개 없어요 전방후원분은 ㅋㅋ
ㅈㅍㅇㅁㄹ 여하튼 어느 특정지역에만 분포하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 시기에도 같은 지역에 이전부터 나타나는 토착 지배세력의 고분양식이 여전히 끊기지 않고 나타나는 양상때문에 큰 의미를 부여할 부분은 아님. 전방후원분의 주인들이 그 지역에서 토착세력을 밀어내고 왕초노릇을 하거나 지배권을 가지지도 못했다는 얘기임
ㅈㅍㅇㅁㄹ 임나부일본설은 말이 안되죠 위에 적어놓듯 세력범위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관방유적이나 지들이 사서에서 밝히는 시기와는 또 연대차가 많이나기도 하고요
정치사와 문화사를 너무 연결해서 볼 필요가 없음유물로부터 그 사회를 추론할수밖에 없는 고고학 입장에선 다소 힘빠지는 소리긴 하지만냉정하게 말해서 특정 문화현상이 꼭 그 사회의 정치사적 변화를 상징해주지 않음예를들어 횡혈식석실분이 4세기에 금강유역에서부터 6세기에 이르면 신라땅 끝까지 다 전파되지만그렇다고 백제가 신라를 정복한게 아닌것처럼 정치사와 문화사는 무관한것일수가있음특정 묘제가 퍼진것에는 이유가 있을수 있지만 그 이유가 꼭 정치적 배경은 아닐수 있고 심지어 이유가 없을수도 있음 문화는 그런것임문화의 흔적은 같은 국가내에서도 전혀다른 경우가 있음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를 비교해보면 알 수있음같은 시기 같은 국적에서 정부가 주도해 만든 유물이지만 크기나 양식이 전혀다름근데 저 만주고원 지대 가면 시기와 주체가 다른데도 북방 유목민족들이 광개토대왕비랑 동일한 형태의 비석만들어놓은걸 볼수있음(알타이문명이라는 도록 참고)
묘르닐 정치사와 문화사가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아예없다고 보긴 힘들지만 그래도 과거는 지금보단 어쩔 수 없죠 무덤을 쓰는 규모나 세력권은 일단 정치에 관여하는 지배계층이고 그 지배계층만이 저런 무덤을 남겨놓을 수 있기 때문에 아 그래도 굳이 연결시킬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단 말에는 동감합니다. 정치사와 문화현상만 생각하면 풀지못하는 문제가 한 둘은 아니니깐요 그리고 횡혈식석실분은 백제 고구려 신라가 만드는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기에 구분이 가능하죠
전라도 쪽 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한 적이 없어서 애매한게 많은 듯
2번이 제일 유력하지 않은가요?
데일리멀티 문헌사적 관점으론 2번이고 형식학적 관점으론 3번도 잘 생각해봐야 될 듯?
동맹국이니일본에 파견간 왕자들도 있었고반대로 일본에서 파견온 왕족들도 있었을거고그래서 그방식대로 무덤지어준듯
신기하네
그래서 일본이 백제의 따까리였다는 말임?
벤제마로 보고 들어옴 ㄷ
ㄴㄴ 저건 예전 내용임이후에 광주 인근에서 일본보다 더 오래된 동일 형태의 고분이 발견되면서입장이 역전된 상황으로 알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