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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깐프.. | 20/07/09 15:35 | 추천 13 | 조회 298

일본도가 사실 내구도로 유명했다?! 쀼숭쀼숭! (2) +299 [11]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47889409

 

 

성종실록 203권, 성종 18년 5월 15일 갑인 2번째기사

 

1487년 명 성화(成化) 23년

 

장령 봉원효가 수개 도감·군적청·춘궁 도감의 일의 정지를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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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장령(掌令) 봉원효(奉元孝)가 아뢰기를,

 


"지금 수개 도감(修改都監)·군적청(軍籍廳)·춘궁 도감(春宮都監)은 비록 모두 국가의 중한 일이더라도 이같은 한재(旱災)에 백성을 부리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또 경비도 적지 아니하니, 청컨대 우선 정지하였다가 가을을 기다리게 할 것이며, 모든 급하지 아니한 비용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마감(磨勘)하여 줄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개(修改)를 늦추면 민원(民?)이 없지 않을 것이고, 군적(軍籍)은 중한 일이며, 춘궁(春宮)의 역사(役事)는 거의 끝나가는데 모두 정지할 수 없다. 다만 줄일 만한 비용은 해조로 하여금 요량해서 줄이도록 하겠다."


하였다. 영사(領事) 심회(沈澮)가 아뢰기를,


"군기시(軍器寺)에 간직한 왜도(倭刀)는 아무리 하품(下品)이더라도 몹시 날카로우니 진실로 군국(軍國)의 중한 기구인데, 가볍게 화매(和賣)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정난종(鄭蘭宗)이 아뢰기를,


"군기시에서 만든 화살촉[箭鏃]이 모두 짧아서 쏘면 갑옷의 미늘[札]을 뚫지 못하지만, 오직 화살대에 끼우는 촉[鑿箭鏃]은 조금 길기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화살촉을 짧게 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뿐만 아니라 화살의 오늬가 좁고 작아서 대현(大弦)에 들어가지 아니하니, 모름지기 넓고 크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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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군비가 많이 나가니 대충 장비 좀 정리합시다! 하는데 병기창에서 보관하는 왜도(=일본도)는 R급이라고 해도 굉장히 중요한 무기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정리하면 바보같은 일임! 이러니까 성종이 'ㅇㅋ니말이 옳다! 왜도를 처리하는 건 금지한다!' 하는 내용. 그리고 화살촉도 가라치지 말고 양품으로 준비하란 내용.

 

 

 

중종실록 63권, 중종 23년 9월 29일 무술 3번째기사

 

1528년 명 가정(嘉靖) 7년

 

야인 정벌의 준비에 관한 허굉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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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장과 군관은 아뢴 대로 하라. 다만 김언순과 임준은 시위 선전관이고 이현은 실 선전관이며, 또 성종조의 일을 보면 박원종(朴元宗)과 윤탕로(尹湯老)는 다 실 선전관이므로 신해년 북정 때에 다 보내지 않았는데, 이제 이현도 실 선전관이니 다른 사람으로 갈음하여 데려가도록 하라. 또 신해년의 전례로는 군관과 제장을 많이 데려갔으나, 지금은 길을 나누어 들여보낼지라도 금군(禁軍)을 그처럼 많이 데려갈 것 없으니, 군관 70명 가운데에 겸사복 5원과 내금위 10원과 우림위 5원을 아울러 70명의 수에 넣어서 데려가도록 하라. 또 훈련 권지(訓鍊權知) 등이 혹 병 때문에 말미받은 것이 30일을 채웠거나 사고를 핑계하여 오래 외방(外方)에 있는데 이러한 무리는 지금이 써야 할 때이니, 이 사람들을 뽑아서 군관으로 삼도록 하라. 또 당초 경(卿)이 왜도(倭刀)를 가져갈 때에 대간(臺諫)이 ‘쓸데없는 물건을 가져갈 것 없다.’고 아뢰었고, 경도 대강만을 아뢰었고 병조가 그 수를 아뢰지 않았으므로, 추찰(推察)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마침내 추찰하지 않았다. 과연 경의 말과 같이 큰 일을 하려면 궁전을 의지해야 할 것이니, 가져갈 궁전의 수를 써서 아뢰어 가져가도록 하라. 왜환도(倭環刀)도 짐작하여 가져가라. 대간은 가져가지 말아야 한다고 하나, 외방에 없는데다 빛이 번쩍이는 것으로 또한 위엄을 보일 수 있으니 쓰고 나서 도로 바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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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왈: 북쪽 여진 및 기타등등 쩌리들 군기 좀 잡아야 겠는데, 그때 일본도 들고가라. 대간이 가지고 가지 말라했을때, 처음에는 나도 그렇다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다. 니 말대로 큰 일하려면 준비가 중요하다. 무기를 넉넉히 챙겨가라. 그리고 일본도는 북쪽 변방에서 보기 힘든 레어템에 큰일에 써먹을만한 간지쩌는 템이라 위엄을 보이기 좋으니 가져가서 잘 써먹어라. 그리고 곱게 반납해라. 사람도 골라서 뽑아가고, 간 다음엔 보고서 가라치지 말고 잘 써라. 대충 그런 내용.

 

 

 

 

선조실록 54권, 선조 27년 8월 2일 정미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비변사가 항복한 왜인 38명의 활용방안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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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가 아뢰기를,


"먼저 온 항왜(降倭) 38명을 조경(趙儆)을 시켜 재주를 시험하니 조총을 쏘아 맞춘 자는 평구로(平仇老)·산여문(山如文) 두 사람뿐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맞추지 못하였습니다. 그 맞춘 자들도 우리 나라 포수(砲手)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 왜인들은 마땅히 무리를 나누어 북도로 보내야 합니다. 다만 먼저 평안도로 간 왜인은 모두 사용(司勇)의 고신(告身)을 주었고 조총으로 쏘아 맞춘 자들은 사정(司正)의 고신을 주었으니 지금도 전례대로 해서 그들의 마음을 위안시켜야 합니다. 그 중에 요시지로(要時之老)·신소족음(信蘇足音)·사우예(査于乂) 등 세 왜인은 염초(焰硝) 굽는 법을 조금 알고 있으니 이 왜인은 우선 서울에 머물게 하여 의식(衣食)을 후히 주고 염초를 굽게 해서 그 재능을 시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 중 사고수계(沙古愁戒)·간내비운소(幹乃飛雲所)·간로수계(幹老愁戒)·조음묘우(照音妙牛)는 칼을 잘 써서 우리 나라 살수(殺手)를 보고 아이들 놀이와 같다고 하였고, 고사로문(古沙老文)은 칼과 총을 주조하는 법을 안다 하는데, 이들 왜인을 어찌하여 머물러 두고 전에 내린 전교에 의하여 배우고 익히게 하지 않는가? 배우려고 하지 않아서인가? 그렇다면 그만이다. 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칼을 왜 값을 후하게 주고 사들여서 그들의 조아(爪牙)를 없애지 않는가?"


 

하였다.

 

---

 

->비변사왈: 항왜라고 다 인간병기는 아니더만요? 평타치는 애들은 걍 북쪽으로 보내고 일 잘하는 애들은 한양에 냅두고 우리를 위해 일하게 하죠? 아 글고 투항한 왜인들에겐 지금까지 꼭 관직이나 임명장을 줬는데, 솔까 걍 명예직이지만 왜인들이 받으면 좋아하더라고요? 주다 말다 하지 말고 걍 계속 주죠?

 

선조 왈: 니들이 말한 항왜 중 빠요엔들이 우리 살수(=조선군의 근접보직)칼질 보고 애들 노는 거랑 똑같다 카는데 걔들을 선생으로 삼아서 우리 살수를 교육시켜라 좀. 그리고 얘들이 총이랑 칼 만드는 법을 아는데 빨랑 얘들의 기술을 돚거해서 우리가 써먹어야지, 왜 아직도 쟤들의 기술을 돚거 못했음? 님들 내가 말한 거 기억을 못하는 거임? 아님 무시하는 거임? 걔들을 투항했다 하지만 왜인인데 서울에 두고 싶음? 제정신? 대충 이런 내용.

 

 

 

 

 

승정원일기 601책 (탈초본 32책) 영조 1년 9월 24일 무오 18/23 기사

 

1725년  雍正(淸/世宗)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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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기율(紀律)이 무너져 버린 데 대한 일입니다. 무릇 용병(用兵)은 전적으로 기율을 위주로 하니, 만약 군대에 기율이 없다면 군졸이 복습(服習)을 하지 않아, 말채찍을 던져 물줄기를 끊을 정도로 많은 군사가 있더라도 쓸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변장이 거느리고 있는 토졸(土卒)이 220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얼마 안 되는 병사로 저런 바다를 가로질러 오는 적군을 방어하는 것은 소국인 추(鄒)가 대국인 초(楚)를 대적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윗사람을 가까이하고 섬기려는 마음이 있느냐에 달려 있겠지만, 전투를 복습한다면 한 명이 천 명을 당해 내는 일을 바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 년 가까이 나라가 태평하다 보니 사람들이 안일에 젖어, 장수는 가냘프고 약하여 고식(姑息)만을 추구하고 군졸은 해이해져 명령이 관철되지 않습니다. 상하가 제각기 분수가 있다는 것을 모르니, 어찌 지체(肢體)가 서로 구제하기를 바라겠습니까. 군병이 도망가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기율에 가장 크게 관계되는 일이지만, 평시에는 대번에 죽이기 어려우므로 국가에서 법을 만들어서 반드시 세 차례 도망하고 나서야 주벌하게 하였으니, 너무도 관대하게 법을 적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마저도 폐해져 시행되지 않아 서너 번 도망하더라도 죽을죄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완악하고 사나운 병사는 도망을 예사로 여깁니다. 한두 사람에서 시작하여 전부 배반하여 흩어지기라도 한다면 장차 어떻게 그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봄과 가을의 조련은 군사로 하여금 전투를 복습하게 하는 일인데도 거만한 군졸은 매번 삯꾼[雇人]을 대신 보내면서 조련하고 열병(閱兵)하는 일을 무엇 때문에 하는지 전혀 모릅니다.야간에 조련할 때에도 어둠을 틈타 빠져나가 배에 오르지 않는 자가 많이 있는데 병방(兵房)과 도훈도(都訓導) 등은 덮어 두고 보고하지 않음으로써 그 죄를 피합니다. 평상시에 이러한 버릇이 오래되다 보면 비상시에 어찌 다시 대오를 잃고 차례를 어기는 일을 두렵게 여기는 자가 있겠습니까. 예전에 손무(孫武)가 궁중의 임금 앞에서 궁빈(宮嬪)의 목을 베었는데 지방의 군병들이 사지로 달려 나가기를 말 달리듯이 하였습니다. 이로 보건대 기율을 평소에 지키지 않고 무예를 평소 복습하지 않았는데 죽음이 임박한 곳에서 그런 군병을 쓸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청컨대 지금부터 영진(營鎭)의 도망한 군사에 대해 특별히 수사(收司)의 법을 만들어 엄히 수색하여 체포하되 세 차례가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군율을 시행하고, 군사를 점고(點考)하는 법은 십분 엄하게 신칙해서 그 용모 파기(容貌?記)를 반드시 하나하나 분명히 확인하게 하소서. 그리고 야간 조련의 항오(行伍)에 대해서도 일일이 점검하여 범한 자는 경중을 구분해서 군율을 시행하되, 병방과 도훈도 등이 먼저 고발한 경우는 그 죄를 용서해 주고, 수군을 나중에 점고하였는데 병방과 도훈도가 숨기고서 고발하지 않았을 경우는 모두 그에 대한 군율을 시행한다면 무너져 버린 기율을 거의 수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기계(器械)가 쓸모 없게 된 데 대한 일입니다. 옛날 조조(晁錯)가 병법을 논하면서 ‘기계가 예리하지 않으면 자기의 군졸을 적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기계와 관련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검이 일본만 못하고 활이 중국만 못한 것은 만드는 사람의 기술이 지극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결코 풍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일본 검이 좋은 이유는 쇠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쇠를 단련하는 기술이 정교하여서입니다. 우리나라도 남쪽에서 양질의 철이 많이 생산되니 백 번 정도 쇠를 담금질하여 두드려 만들기를 일본의 방법대로 한다면 또한 예리한 검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장(工匠)의 기술이 서툴러서 철의 품질을 가려내지 못하고 제련을 정교하게 하지 못하는 데다, 제조를 감독하는 자는 적은 물력으로 많이 제조하는 것을 능사로 여깁니다.이에 근년 들어 만들어 들인 새 검을 한 번 나누어 준 뒤로는 예전 검 가운데 좋은 것들마저 모두 없애 버려 현재 도성의 친위(親衛) 병력이 차고 있는 칼들은 모두 칼날이 무뎌 쓸 수가 없는 연도(鉛刀)에 해당합니다. 변진의 검에 있어서는 더욱 형편없으니, 단지 두부(豆腐)를 자르는 데라면 모를까 어찌 적병을 베는 용도로 쓸 수 있겠습니까.

 

 

 

무릇 활을 만드는 법은 반드시 각심(角心)의 큰 조각을 절취해서 펼쳐놓는데 뿔의 결이 곧고 순한 뒤에야 풍우(風雨)와 서습(暑濕)에도 부서지거나 비뚤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궁장(弓匠)은 전적으로 뿔을 남기는 것만을 이롭게 여겨서 잘게 재단해서 자잘하게 이어 붙입니다. 그 결과 나뭇결과 뿔의 성질이 서로 잘 맞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습기의 피해를 입으면 뿔이 들려 활이 비뚤어집니다. 서울에서 만든 활은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지만 변진에 보관한 것은 크게 놀랄 정도로 형편없습니다.변장은 방포(防布)를 급대(給代)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달리 재원으로 삼을 만한 물품이 없는데, 군대의 병기를 수리하지 못하면 잘못한 책임이 곧바로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외양만 그럴 듯하게 꾸며서 법조문을 피하고 견책을 막는 계책으로 삼습니다. 이른바 새로 만들었다는 것은 겨우 모양만 갖춘 것이고, 이른바 보수했다는 것은 창고 안에서 100년 혹은 7, 8십 년이나 오래 묵은 활의 겉을 자작나무 껍질로 싸맨 다음 불을 붙여 뜨겁게 해서 바로잡아서 점고를 받을 적에 늘어놓을 뿐입니다. 만약 윗줄을 끌어당기기라도 하면 모두 손이 가는 대로 파열됩니다. 직임을 다하지 못하는 변장이 이런 식으로 기망(欺罔)하니, 참으로 죄를 물을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 또한 형세로 보아 당연한 일입니다. 활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물역(物役)에 대해 영문(營門)은 이미 백급(白給)해 줄 물품이 없는 데다 달리 해결해 줄 대책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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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지금 군대가 개판이라 개나소나 말이나 가라친다는 내용. 옛날 중국 고사, 특히 조조의 말을 예시로 들어 좋은 무기가 있어야 병사가 잘 싸우는데 우리나라(조선)의 현 상황은 칼은 일본에 밀리고 활은 중국에 밀린다는 문제제기.

 

우리나라도 일본 못지 않게 철이 난다. 그런데 장인들 기술이 딸려서 일본만한 검을 못만든다. 우리나라 장인은 걍 찍어내는 거에 의의를 둔다. 그나마 서울에서 쓰는 검은 괜찮은 편이지만 변방으로 가면 군용이 아니라 걍 두부나 잘라야 할 수준이다.

 

일본애들의 철은 좋다. 하지만 우리나라 철도 못지 않다. 다만 일본애들의 기술은 정교하기 그지없는데, 이또한 어떻게든 돚거해서 써먹으면 될 것이다.

 

활도 칼이랑 다르지 않아서 없는 물소뿔에 집착하다보니 활의 질도 개판났다. 역시 그나마 서울에서 쓰는 건 괜찮지만 변방으로 가면 걍 나무 깎아서 활모양만 만낸 가라군장이 많다. 치장물자라고 있는 활이라는 것들은 한 번당기면 작살난다.

 

애들을 족쳐야 옳은 일이라 하겠지만 물건 만드는데 들어갈 물자를 보급 해주질 못하니 족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보급을 해주자니 중국 무역 루트가 작살나서 보급해주기도 힘들고, 참 상황이 힘들다. 그런 이야기.

 

 

 

 

그 외에 명나라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 조선의 무예도보통지를 보면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것들이

 

1. 일본애들 칼 튼튼하고 좋음

 

2. 투항한 일본애들 관찰해보니까 얘들이 칼만드는 기술이 접쇠나 철 가공법이나 그런 건 우리랑 비슷한데 뭔가 좀 다름

 

3. 아마 뭔가 좀 다른 그게 엄청 중요한 것 같은데, 그걸 돚거하기가 힘듬. 암튼, 그렇게 만든 칼로 쓰는 검술은 꽤 위력적임

 

이런 내용임.

 

 

기효신서는 책의 절반 정도가 걍 일본애들이 칼들고 개돌하는 걸 어떻게 효율적으로 막느냐? 를 낭선을 쓰세요 진영을 잘 짜고 우주방어를 하세요, 포수를 쓰세요 그런 식으로 설명해준다고 해도 될 정도고.

 

 

무예도보통지는 아예 총 4권 중 1권을 일본도+일본검술 패키지를 써놓고 '자 이거보고 일본도 다루는 법이랑 일본검술 배우셈ㅇㅋ?' 이러고 있음. 이것도 걍 아무 검술이나 써놓은게 아니라 김체건이란 사람이 일본까지 건너가서 직접 일본 검술을 배우고, 일본도 만드는 기술보고 와서 백동수랑 기타 등등 장용영 장교들이랑 쓴거임.

 

 

 

기효신서를 쓴 척계광은 왜구 슬레이어란 별명을 붙여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왜구(말이 왜구지 몇몇 다이묘들의 후원을 받는 사략선+게릴라 수준)를 족치고 다니던 사람이고, 무예도보통지를 쓴 사람들은 무관 출신 장교들이 다수로 현장에 칼밥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임.

 

즉 현장을 모르는 먹물들이 쓴 책은 아니라는 것.

 

 

 

 

이렇게 길게 앞에서 사설을 써놨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베스트에 갔던 글에 누가 '뇌피셜만 써놓은거 아님?' 이라 하기에 당시 사료를 몇 개 가져옴.

 

사실 저것도 일부 중 일부고 검색하거나 pdf 파일 찾아보거나 책을 보면 저런 기록 수두룩함.

 

 

 

암튼 대충 일본도가 내구도 좋았다?! 뿌슝뿌슝에 대해 함 더 써보겠음.

 

 

1. 일본도의 쿠크다스 아님?? 접쇠공정+사철 콤보잖아?

 

환도도 접쇠+사철로 만듬.

 

가야, 발해 등 한민족이 낀 문명에서 만든 철기들 대부분은 사철광산에서 캔 사철로 만든 것들임.

 

접쇠공정은 오히려 내구도에 도움을 줬는데, 대충 설명하자면 접쇠공정 중에 철에 들어가는 불순물들이 품질을 올려줬기 때문.

 

대충 그 불순물들이 철을 합금화 시켜줬다고 생각하면 됨(정확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대충 이렇게 생각하셈)

 

 

 

2. 아니 그럼 일본애들은 왤캐 칼을 많이 차고 댕김??? 많이 부러져서 그런 거 아님??

 

전국시대~에도시대 초중기 기준 일본애들이 칼을 차면 보통 구성이 아래와 같음

 

카타나(긴 거. 게임으로 치면 1번 무기. 즉 메인 무기)+와키자시(짧은 거. 2번 무기. 보조 무기임)

 

여기에 좀 더 신경쓰면 탄토(와키자시보다 짧은 거. 현대로 따지면 권총 정도 무기. 또는 대검 혹은 공구 느낌)까지 추가.

 

즉 많이 부러져서 많이 들고 댕긴게 아니라 걍 각자 다른 역할을 가진 다른 종류의 일본도를 차고 다녔다는 거임.

 

 

 

3. 일본도는 베기 전용이라 베는 것만 하고 칼의 면끼리 부딪히는 것도 금지했다는데 그거 내구도가 구려서 그런 거 아님??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고류 검술 보면 일본도로도 찌르고 베고 패고 레슬링 걸고 칼로 할 수 있는 거 다함.

 

환도도 찌르고 베고 패고 두들기고 칼로 할 수 있는 거 다했고.

 

롱소드도 그랬고. 전근대 냉병기는 수렴진화 마냥 대부분 비슷하게 발전함.

 

칼의 면끼리 부딪히는거 금지! 이런 얼빠진 검법을 가진 문명은 아마 옛날에 이미 멸망했을거임.

 

 

 

4. 아니 그럼 일본도는 걍 언터쳐블 짱짱튼튼한 무기라고?

 

반반.

 

에도시대 초기까지 일본도 품질관리가 매우 잘됨. 지방마다 도제식으로 공방 한 두개 있고 거기서 공돌이 갈아가며 명품만 소량 생산했거든.

 

이때 나온 일본도들은 명품ㅇㅈ합니다 이 수준.

 

그런데 에도시대 초중기가 되면서 칼의 수요가 폭증함. 왜냐? 막부가 사무라이는 걍 칼을 무조건 차고 다니래.

 

그래서 이때 조선에서 도입한 발달한 가마기술이 쓰임.

 

조선은 중앙집권 국가로서 병사들한테 뭐라도 줘야하니까 대량생산에 시스템이 맞춰져 있었는데(나라 망할때까지 이 종특을 유지해서 대한제국군은 일본군이 병기창 작살내기 전엔 나름 탄약빵빵하게 만들 준비 딱 하고 있었고, 가동직전까지 갔었음)

 

이게 대형 가마로 칼을 찍어내다보니 고온으로 철의 불순물을 싹 다 날아가고 걍 통짜강철이 나옴. 뭐랄까 똥철까진 아닌데 그 비슷한 철들이 나옴.

 

거기에 각지의 공방들이 옛날엔 자기들이 손수 수십 년 동안 철질하면서 얻은 감각으로 제련한 철을 썼는데 이젠 걍 싸게 파는 제련된 철을 사다가 그걸로 붕어빵찍듯이 일본도를 만들어서 보급함.

 

이렇게 조선의 선진 동아시아 포드식 생산으로 나온 일본도들은 개구림.

 

그런데 이미 에도시대는 평화의 시대라, 구리던 말던 값이 쌌기 때문에 잘만썼음. 왜냐하면 걍 정장의 일부라 칼부림할 필요도 없고 옆구리에 차기만 하면 되거등.

 

 

 

5. 아니 잠깐 그럼 환도 내구도가 구렸다는 것 같은데?

 

ㅇㅇ맞음

 

물론 장교들이 쓰는 건 나름 오더메이드라 튼튼짱짱맨이었겠지만 보급품은 걍 구렸던 거 맞음.

 

오죽하면 병사들이 보급받은 환도를 분질러서 짧게 들고 댕기다가 걸렸다는 이야기가 심심하면 실록에 나올 정도임.

 

참고로 병사들이 환도 분지른 이유는 걍 군장이 무거워서 가라쳤다고 생각하면 됨.

 

조선군 표준 무장이 살수의 경우 무기만 따져도 방패+표창(말이 표창이지 투창에 가까움)+갑옷+활+화살 몇대+환도라 넘넘 귀찮고 무거웠기 때문.

 

그렇다고 환도가 쿠크다스였던 건 또 아니고, 당연히 칼로서 기능은 했음(그러니까 싸우라고 보낼때 들려줬겠지?)

 

높으신 분들은 구닌들이 반토막 내 환도로 가라치는 걸 싫어해서 매번 '아 환도 품질 좀 개선해야 함요' 하면서 결국 유야무야 넘어가곤 했음.

 

왜냐? 예산은 한정되어있으니까. 물론 환도랑 조총이랑 궁시에 갑옷에 화약에 뭐든 다 개량하면 좋겠지.

 

그런데 예산이 부족하니까 걍 환도는 대충 넘어가고, 비싼 궁시도 대충 넘어가고 포수에 올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함.

 

 

 

단 구조적인 면에서 칼자루+검신의 조합은 환도가 더 튼튼했음

 

일본도는 도신과 칼자루를 메쿠기(대나무, 뼈 등으로 만든 못)으로 고정했는데 환도는 걍 우직하게 리벳을 때려박아서 칼이 박살나면 박살났지 도신이 날라갈 일은 없었음.

 

참고로 이 구조적 강도 역시 조선식 대량생산의 부산물.

 

현대로 치환해서 생각하면 군대가 제식소총만들어 주는 거랑 같음. 제식소총을 만들때 첨부터 커스텀의 원활함을 신경쓰면서 만들진 않잖아?

 

걍 싸고 빠르게 만들 수 있으면서 써먹을 수 있는 품질이면ㅇㅋ인 총을 주지. 환도도 대략 그런 느낌이었다는 것.

 

 

 

반면에 카타나는 에도시대 중후기 들어가면서 현대 정장의 넥타이나 구두 같은 느낌이 되서 개인의 커스텀이 어느정도 가능했고 무사들도 자기 칼 꾸미는 재미에 커스텀덕질을 했기 때문에 칼의 부속들이 비교적 해체조립하기 쉬운 구조였음.

 

문제는 옛날에 만들어진 명품 카타나는 그렇게 해체조립해서 가지고 놀아도 구조적 강도가 담보가 되는데 조선식 대량생산으로 만들기 시작한 카타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

 

환도는 애초에 분리조립을 생각하지 않고 뚱땅뚱땅 만들었지만 카타나는 그렇지 않았음으로, 에도시대 후기로 갈수록 카타나가 실전무기보다는 의장용 무기 느낌이 강해지고 간지만 나게 만들어지면서 조선식 대량생산 공법에서 나타나는 내구도 문제가 유독 심각하게 나타나게 됨.

 

물론 지역마다 편차는 있어서 주고쿠의 모리, 규슈의 시마즈, 관동의 아이즈 등 돈많고 기술도 좀 있는 지역과 가문의 카타나는 에도시대 끝물까지 그럭저럭 카타나 품질 유지에 성공함.(그럼에도 전국시대~에도시대초기 때 카타나보다 내구도가 구릴 수 있다는 게 함정)

 

 

 

6. 그럼 조선은 암것도 안하고 일본도에 걍 개쳐발리고 있었다는거임?

 

당연히 아니고 실록이나 승정원 일기나 그외 기록들에서

 

'아 일본애들이 일본도를 수출안하네? 좀 짜증나네?'

 

'아니 항왜들한테 일본도 만드는 기술 좀 배워오라는게 그렇게 힘듬?'

 

'아니 일본에 가서 대충 일본도 만드는 기술 돚거 못해옴? 이런 간단한 일도 못하는데 니들 녹봉은 왜 처먹고 있음?'

 

'아니 가서 왜구 죽이고 일본도 뺏어오라는데 그게 그걸 못함?'

 

'아니 이순신은 왜군 다 쳐죽인 다음 논도 일구고 물고기도 잡고 노획한 왜도로 무장도 하고 대장간도 굴리고 다 했는데, 니들은 왜구놈들 배 몇 척 잡고 거기서 왜검을 건져오라는 것도 못함? 나한테 개기는거임?'

 

'아니 항왜들한테 관직(명예직)을 주고 땅도 주고 그랬는데 왜 이놈들은 간 만보고 기술이전할 생각을 안함? 단체로 돌아버렸나? 한번 왜인은 걍 왜인인거임? 죽여야함??'

 

'뭐? XXX고을의 김길동이가 일본도 파쿠리를 만드는데 성공해? 야 걔 서울로 부르고, 돈이랑 포상 좀 준 다음 기술시범 보이라고 해라.'

 

이런 말들을 볼 수 있음.

 

재미있는 건 일본->조선->중국 중개무역에서 정작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 일본도를 중국에 팔아 이득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는 건데, 일본애들은 조선과 비교했을 때 중국에 대한 조공무역의 기회가 상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임.

 

이렇다보니 조선이 일본도를 대하는 태도도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1. 일본도 좋은 무기니까 만드는 법을 돚거하든 아님 노획하든 해서 병기로 써먹자.

 

2. 일본도 팔기 좋은 상품이니까 일본애들한테서 덤핑가격으로 사온 다음 비싸게 중국에 팔자. 아님 우리가 자체생산해보자.

 

대충 이럼. 비율로 따지면 1번이 더 높았지만.

 

 

 

암튼 그래서 가끔 청나라 사신이 조선인한테 일본도와 홍삼을 뇌물로 은근히 요구하는 뭐 이딴 혼종이 다있나 싶은 그런 기록도 나옴.

 

사족으로 조선에서 일본도는 왜도, 왜검, 왜환도, 대검, 대도, 일본도 등등 온갖 이름으로 불렸음.

 

대충 읽어보다가 어떤 칼을 묘사하면서 '짱짱 간지나고 튼튼하면서 예리함ㅋㅋ'이러면 걍 '아 일본도구만' 이렇게 생각해도됨.

 

구하기 힘들다까지 붙으면 99%이상 일본도임.

 

 

 

혹시 모를 일뽕을 위해 몇 마디 남기자면 그렇다고 일본도가 뭔 우주채강 명검은 아님

 

전근대 냉병기는 품질이 다 비슷비슷함.

 

현대 기술로 만든 냉병기가 100점이다!

 

이러면 전근대 시절 냉병기는 100점 근처도 못가고 걍 10~20점 사이에서 고만고만하게 놀고 있다고 보면 됨.

 

현대 시점에서 보면 100점도 안 되는 10~20점 자리 무기는 다 그게 그거 같겠지만

 

당시엔 그런 무기를 들고 생사를 걸고 싸웠으니 10~20점 자리 무기에서 1점, 2점 정도 차이가 엄청나게 크게 느껴졌던거고.

 

 

 

마지막 사족으로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돚거해간 기술이 대형 가마를 통한 대량생산 이거 말고 다른 것도 있는데, 하나는 은제련법이고, 다른 하나는 도자기 제작법임.

 

즉 1. 대형가마를 통한 대량생산  2. 은제련법  3. 도자기 제작법  이 셋을 돚거해간 셈인데, 일본은 이 세 기술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게 됨.

 

근데 그거 까지 다쓰려면 정말 너무 귀찮은 일이 되서 그냥 사족으로 끝내겠음.

 

 

 

 

 

 

유머는 일 안하고 이 시간에 뻘글쓰는 내가 유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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