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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틀 | 23/01/29 23:38 | 추천 6 | 조회 60

스압)영국이 세계에 분탕을 치고 다녔다고? +60 [3]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0208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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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부터 18세기까지 진행되었던

인클로저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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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클로저: 양이 먹을 목초지를 얻기위해 공유지를 풀밭으로 만드는 것


종교개혁은 또 왜? : 1215년 마그나카르타 선언 이후

무산계급들이 왕과 영주와 교회의 숲을 공유지로 사용하며

경제적인 자급을 유지하는 것은 누구도 침해하지 못할 당연한 권리처럼 존중되었으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종교개혁으로 중세가 종말을 고하고 근세가 열린 시점이다.

영국 내에서의 종교개혁은 영국의 교회에 대한 로마교황의 지배권을 거부하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된 헨리 8세가 주도했다.

헨리 8세는 가톡릭 교회의 소유였던 영국 내 수도원과 그에 부속된 공유지를 해체하여

영국의 신흥 지배 세력인 젠트리들이 땅을 차지하고 종획(인클로저)을 통해 이익이 될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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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지의 사유화가 진행됨으로서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


전체 노동 인구의 80%가 실업자가 되어버린 영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빈민법을 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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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법 제창 포스터)


빈민법이란?


이름만 들어보면 빈민들을 위한 복지법같지만


사실은 완전 반대로 별명이 '피의 입법'일 정도로

오늘날의 관점에선 미친 법으로



위에 인클로저와 종교계혁으로


공유지 사용권의 수탈의 결과 발생한 부랑자들을

비노동은 의지의 문제라고 여겨 전부 범죄자로 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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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데 덮친격으로 이후 거지면허가 시행


건강한 부랑자는


태형과 ‘노동종사’에 맹세,

2회땐 태형과 귀 절단,

3회 체포시엔 사형하는 미친 짓거리를 몇십년간 자행함


그래서 빈민층 부모들은 자녀에게 선물이라고

안전하게 팔다리 하나씩을 잘라주는게 성행함...


이마저도 돈이 없으면 지 스스로 부지깽이같은 걸로 몇 번 자를 부위 찔러놓고

밧줄 같은걸로 묶어서 신체 일부분을 썩혀서 잘라냈음


당연히 감염 등 기타 합병증으로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안그러면 불법 거지가 되서 인간이하 노예로 살아가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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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에드워드 6세가 1547년 개정한 법령에 기반하여

일자리 없는 사람들은 고발한 고발자의 노예로 종속

만약 도주 후 2주일이 지나면 종신 노예화.

잡히면 낙인,강제노역

이것 때문에 거짓고발이 난무해서

이웃은 커녕 가족도 못믿는 개인주의가 성행



이 법이 개인주의의 개념 시초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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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이런 빈민, 실업자를 물리적으로 줄이는 시도는 전부 효과가 별로 없었음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일자리가 없고,

있더라도 일을 해야만하는 사람만 수만명

노동을 하고싶어도 못하게 되었기 때문


그런데 상류층은

이런 배경같은건 몰겠고


'모든 무질서의 원천은 구걸과 게으름'

'노동은 만병통치약'

'게으름=반역'

'노동=윤리적'


으로만 생각해서


노동 교화라는 개념을 또 만듬 ㅋㅋㅋ


실업자라는 반역분자를 잡아서 노동을 시켜 교화시킨다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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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바로 여기서 오늘날의 '근대적 경찰'이라는 개념이 나옴


감금과 노동을 연결하여 도덕화된 신체,

인간을 만들려는 조치의 체계가 '폴리스' =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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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아이를 걱정하는 모습이 아니라 팔다리 멀쩡한데 왜 일을 안하지? 하고 고민하는 장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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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아니라 대다수의 일반인 기준으로는 16세기 영국 식민지인>>>>>>> 영국 본토인 일 정도임.

무굴제국의 탄압받던 식민지인1이 본토 시민보다 더 인간적으로 살았음.



19세기 밧줄침대나 관짝침대 아기 굴뚝 청소부도 저 시기에 비하면 양반임


러다이트가 다 이유가 있던것임




자주 나오는 인클로저 까면 나오는 비판에 대해 2줄 요약



인클로저 하고 농업 생산량이 줄었다? = X

인클로저 하고 중산층이 붕괴했다? =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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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합니다!


채무자 감옥!!


영국(다른나라도 있었지만 영국이 제일 유명함)에 있던 곳으로


말그대로 빚을 못 갚는 사람들을 쳐넣는곳이다


영국 근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서

주인공이나 기타 등장인물이 빚 졌을때 쫒겨다닌다면

십중팔구 여기 갇히는게 싫어서 도망치는거다.


지금처럼 대놓고 떼먹은 사람들이 아니라

변제 의지가 있는 사람도 쳐넣어버렸다.

그리고 사람을 가리지도 않아서 현역 군인.

그것도 함장같은 중요보직까지도 잡아다 쳐넣어버리기 일쑤.



그럼 여기가 왜 카이지에 나오는 지하 노역소보다 더 악독한가?



여기는 채무자 본인보다는 채무자의 친인척, 지인들에게서 돈을 뜯는게 목적인 시설이다

노역소는 그래도 가족은 안건드리고 본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데 반해 대놓고 가족을 끌어들이는것


그리고 정부 시설이 아닌 사기업 시설이다.

다시말해 돈이 눈이 벌개져있다는것.

그래서 노역소처럼 식비부터 시작해서 사실상 채무자의 모든 행동에 돈이 들었으며


노역을 시키고 쥐꼬리만한 페리카라도 쥐여주는 지하노역소와 다르게

정해진 노역도 없고 당연히 월급도 없었다.

다시말해 친인척이 돕지 않는한 굶어 죽을수밖에 없다는것이다


그나마 돈 관련으로는 깔끔하게 구는 제애그룹과 다르게 여기는 썩어빠졌기 때문에

간수가 채무자에게 들어온 돈을 떼먹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소위말하는 범털.


그러니까 끗발이 좀 있는 애들은

넓고 깨끗하고 쓸만한 방을 배정받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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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도 없는 애들은 이런곳에서 썩어야 했다

당연히 잘 먹지도 못하는데 이딴데 가둬놨으니 전염병이 만연했는데

앞서 말했듯 약값은 본인 지출!


이런저런 돈 내다보면 빚보다 채무자 감옥에 진 빚이 더 많아져서 못나오는 케이스도 속출.


형기는 빚을 갚을때까지. 다시말해 이론상 영원히 갇힐수도 있었다

보통 그전에 죽어나갔지만.


그나마 돈 벌 자유는 있어서 각자의 자본금이나 물건으로 내부에서 장사를 하거나

허락된 외출시간동안 구걸을 한다던가 해서 돈을 벌수는 있었다.


...잠깐 이거 오오츠키의 매점이잖아.


영국의 유명한 작가.

찰스 디킨스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여기 갇히는 바람에

죽을똥을 싸면서 개고생을 해야했다











1834년 영국에서는 새로운 빈민법을 도입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이유로 이 법안을 지지했습니다.


-빈민 관리비용 감소.


-길거리의 거지들 감소.


-노동으로 빈민들을 자력갱생하게 만들어 줌.



신 빈민법은 빈민들이 구빈원(Workhouse)에서 거주하며 의복과 식사를 보장받게 해 주었습니다.


구빈원에 들어온 아동들은 약간의 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보살핌의 대가로, 구빈원에 거주하는 빈민들은 매일 여러 시간동안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빅토리아인들이 이 관점을 공유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 리처드 오스틀러 같은 사람들은


구빈원을 '가난한 이의 감옥' 이라 부르며 신 빈민법에 반대했습니다.


빈민들은 구빈원이라는 위협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에 휩쓸려 북부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과제=


1. 1837년에 만들어진 신 빈민법 반대 포스터의 일부입니다.









"제발 나으리, 자비를 베풀어 들어보내 주십쇼, 아니면 적선이라도요. 우리는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요."


"그럼 가서 도둑질이라도 하든가. 여긴 못 들어온다-꺼져, 이 버러지들아."



-구빈원에 들어오려는 이들은 얼마나 간절한가요?


-구빈원 관리자의 대답은 무엇인가요?



2. 포스터의 다른 부분입니다.








"여기서 대마를 찧는 건 돌 깨는 것보다 더 힘들어. 귀족 나으리들이 자비를 베푸시기를."


"우리는 삭발당하고 셔츠를 입는 것도 금지야; 서인도 노예들에게 물어봐도 자기들이 더 낫다고 할 걸."




-빈민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빈민들은 자신들이 서인도 제도 노예들보다 못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을까요?


-왜 빈민들이 삭발을 당했을까요?






3. 포스터의 다른 부분입니다.







"수레에 실린 게 뭔가, 조?"


"죽은 빈민 갓난애들입니다. 이것들을 병원으로 가져가서 의사에게 팔 거에요. 일주일마다 이만큼씩 쌓인답니다."



-'조'의 수레에 실린 것이 무엇인가요?


-그는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나요?



4. 포스터의 다른 부분입니다.









"오, 나으리,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저는 늙고 병약한 몸이라 그렇게 고된 일은 할 수 없답니다. 제발, 10분만 쉬게 해 주세요."




"쉬겠다고, 그래! 늙고 게을러빠진 도둑놈 주제에 신사 취급을 받으시겠다?


젊든 늙었든 여기 왔으면 일을 해야지. 빈민이란 건 그러라고 있는 거잖아.-가서 대마나 찧어, 건방진 늙은이."







-이 포스터에서는 노인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나요?


-왜 정부에서는 구빈원 노동자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감시하려 했을까요?




5. 포스터의 다른 부분입니다.








"신 빈민법 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모든 빈민들은 아침 4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3시간 동안은 구빈원 내외부 청소를 해야 합니다."




"알림. 하루 2끼 아침과 저녁을 10분 안에 먹지 않을 경우, 채찍 39대. 허가 없이 구빈원을 이탈했을 경우,


1일 금식. 불복종시 채찍 29대 및 3일간 지하 독방에 구금. 태업시 1개월간 디딜방아 형."




"알림. 정부의 명령에 따라, 반역이나 불복종 행위를 조장하는


모든 정상인 빈민들은 재판 없이 목이 매달리고 시신은 의사에게 판매될 것이다."






-포스터에 따르면 빈민들은 몇 시간동안 노동을 했을까요?


-그들에게는 몇 시간의 수면시간이 보장되나요?


-그들이 어떤 처벌을 받는지 확인할 수 있나요?




6. 이 포스터를 그린 작가는 신 빈민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7. 이 포스터를 구빈원에서 실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밝히는 증거로 쓴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배경=




1834년 이전, 빈민 복지 비용은 가면 갈수록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이 금액은 중상류층의 지방세에서 충당되었습니다. 따라서 중상류층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게으르고 일을 피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대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퍼져나갔습니다.




수 년동안의 불평불만 끝에, 1834년에 신 빈민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신 빈민법은 빈민 복지 비용을 절감하는 체제가 전국에 적용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신 빈민법 아래, 각 교구에서 구빈원을 관리할 조합이 만들어졌고 구빈원이 없다면 새로 지어야 했습니다.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면, 모든 빈민들은 집을 떠나 구빈원에 들어갈 준비를 갖췄을 때만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빈원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매우 까다로웠고, 따라서 간절히 도움을 바라는 소수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서로 분리되어 구빈원의 다른 위치에 배속되었습니다. 이 곳에는 엄격한 규칙과 규율이 있었습니다.


이 곳의 수감자들은 남녀노소 중노동을 했으며, 종종 돌 깨기나 뱃밥 만들기 같은 기피 직종을 맡기도 했습니다.


아이들도 공장이나 광산에서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신 빈민법이 통과된 직후, 여러 충격적인 사건들이 뉴스 앞면으로 치고 올라왔습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앤도버 구빈원에서는 반쯤 굶어 죽어가는 빈민들이 썩어가는 시체에서 살을 발라내 먹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정부의 대처는 구빈원 탈주에 대해 더 엄격한 규정을 도입하고 경찰 수사 대상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구빈원의 빈민들은 멸시와 규정 남용을 일삼는 비양심적인 관리인과 의료인의 자비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빈원에 갈 일은 없었지만, 그들이 실직하거나 병들거나 늙게 되면 언제나 위협이 닥쳐왔습니다.


구빈원에는 고아, 노인, 병자와 광인들만이 있었습니다. 신 빈민법이 정말 인기가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법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난해진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자국민에게도 가혹하게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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