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스 원더의 트레이너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비록 헬창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까지는 없다지만, 그래도 근육 트레이닝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까지 자기처럼 근성장의 고통과 희열을 맛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오늘, 그는 한 사람의 헬린이를 얻었다.
“저도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까요.”
에이신 플래시의 트레이너가 말했다. 그도 이제 슬슬 나이가 들었는지,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다. 20대 초반의 그 경이로울 정도로 튼튼하고 체력 충만하던 그 시기는 어디로 갔는가.
아무튼, 그렇기 때문에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
물론, 그라스 원더 트레이너의 생각처럼 헬창 같이 운동할 생각은 전혀 없다. 적당히, 말 그대로 적당히 자기 몸 관리만 될 정도로 운동을 하려는 것이다.
눈앞에서 우헤헤 웃고 있는 이 선배는 컨셉에 잠식된 나머지 ‘활 쏘려면 근력이 필요해’라며 (특히 팔과 등 근육에 한해서는) 미친 것 같은 헬창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자기는 그렇게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적당히. 절대로 적당히. 과하지 않게.
“그렇지? 그러면, 하기로 한 거다?”
“그래도 중앙 트레센 내부 시설 이용하면 안 돼요?”
가까운 곳에서 운동하면 좋지 아니한가. 트레이너 기숙사도 가까워 왔다 갔다 하는 데에 체력을 소진하지 않아도 되고, 시설도 훌륭하고, 이용료도 저렴한 편이고, 장점이 많다.
하지만 그라스 원더의 트레이너는 고개를 내젓는다.
“그건…거기는 조금 그래. 괜히 막 담당 애한테 보이고 싶지도 않고.”
“그건 그렇죠.”
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담당 우마무스메, 그러니까 에이신 플래시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것은 아마 눈앞의 선배도 마찬가지이리라. 그가 아무리 그라스 원더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거의 없다고 해도, 사춘기 여자아이 앞에서 그런 꼴을 보이긴 싫은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중앙 트레센 내부라는 장점, 그리고 값싼 이용료와 훌륭한 시설이라는 장점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상관없지만, 너는 네 담당한테 헬스 하는 거 보이면…분명 좋은 꼴은 못 볼 테니까.”
그러나 계속해서 고개를 내저으며 한사코 안된다고 하는 그라스 원더 트레이너의 강한 의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이며 알겠다고 답한다.
“아, 알겠어요. 형 말대로 근처 헬스장으로 가요.”
“그래, 잘 생각했어. 내가 차 태워줄 테니까.”
“그러시면 감사하죠. 그러니까…저희 언제 만나서 갈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좋은 거 하러 가는 거잖아?”
“그러면, 오늘 저녁 어때요? 오늘 저녁엔 일정도 없고, 저도 오늘은 몸을 좀 쓰고 싶으니까요.”
“물론이지. 그러면 6시에 트레센 정문 앞에서 기다려. 차 가지고 올 테니까. 최고의 경험을 시켜주마, 헬스 최고~! 우효~!”
“아, 아하하…….”
가끔 생각하는 것이, 눈앞의 이 선배가 금발로 염색 및 태닝하고 출근한다면 어디 이상한 어둠의 세계에서 보았던 19금 만화에서 빼앗는 역할로 나오는 사람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에이신 플래시를 지킬…필요가 있나? 우마무스메가 히토미미보다 월등히 강한데, 아무리 헬창 선배라도 발차기 한 방에 나가떨어질 텐데.
아무튼, 연신 우효~! 우효~! 소리를 내뱉으며 헬린이를 헬스의 세계로 끌어들였다는 기쁨을 표출하는 선배를 보며, 쪽팔리니까 그냥 혼자 할까,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에이신 플래시의 트레이너였다.
* * * * * * * * * *
“……비상이에요, 비상.”
에이신 플래시는 중얼거렸다. 평소의 그녀와는 달리 초점을 잃어버린 눈동자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트레이너의 대화를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그녀의 트레이너가 잠시 물을 마시러 간다고 하고선 평소보다 3분 11초나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3분 12초가 지날 무렵 계획을 변경하고 트레이너를 찾으러 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트레이너는 그라스 원더의 트레이너와 정수기 앞에서 대화하고 있었고, 에이신 플래시의 마음속에서 요주의 인물로 찍힌 그라스 원더의 트레이너였기 때문에, 조용히 어떤 대화를 하는지 우마미미를 쫑긋거리며 들어버렸을 뿐이다.
아무튼 엿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될 텐데, 절대로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에이신 플래시가 담당 트레이너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점이 아니다. 그 내용, 그라스 원더의 트레이너와 말한 내용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트레이너가, 에이신 플래시의 트레이너가 그런 저속한 짓거리에 손을 대려 할 줄이야.
그것도 이 에이신 플래시가 있는데, 이 에이신 플래시가 있는데! 완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외모와 마체를 가진 이 에이신 플래시가 있는데!!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트레이너 씨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었지만, 에이신 플래시는 한번 참았다. 여기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 트레이너 씨가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하면 끝이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일이 된다. 괜히 에이신 플래시만 트레이너에게 폭력을 사용한 범죄자로 낙인찍힐 뿐이다.
그러니, 절대로 반박할 수 없는 증거와 함께 트레이너 씨를 교정…아니, 잘못을 뉘우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절대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란 바로…현행범.
헬스를 받으러 가는 트레이너 씨의 뒤를 밟고, 그 저속한 곳으로 들어가자마자 트레이너 씨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트레이너 씨를…아니, 뒷일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튼, 이 일을 혼자 할 생각은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 작당 모의한 트레이너가 둘인데, 우마무스메가 한 명이어서 되겠는가.
제 트레이너를 헬스의 늪으로 끌어들인 죄, 담당분께 혼나는 것으로 뉘우치세요. 에이신 플래시는 작게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켜서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르, 하는 통화음이 잠시 들리다가, 이내 휴대폰 반대편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머, 무슨 일인가요~?]
“그라스 씨. 비상사태입니다.”
[……저희 트레이너 씨가 뭔가 사고라도 치셨나요?]
예리하다.
아니, 예리하다는 것보다는 에이신 플래시가 비상사태라고 말하며 그라스 원더에게 전화를 하는 것은 그녀의 담당 트레이너와 연관된 일이 아닐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확신은 너무 당연하게도 정답이다.
“제 트레이너 씨와 그라스 씨의 트레이너 씨가…헬스를 간다고 합니다.”
[헬스……그렇군요. 우후후, 후후, 헬스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그럼요~. 트레이너 씨에겐 교육이…우후후, 며칠간은 꼼짝도 하지 못할 교육이…필요하겠네요.]
“오늘 오후 여섯 시에 트레센 정문에서 출발이라 들었습니다.”
[맞춰서 갈게요. 저희는 어디에서 만날까요?]
“정문 근처의 커다란 나무 뒤에서 만나요.”
[나기나타 들고 갈게요~]
“저도 사브르 챙겨 가겠습니다.”
[그럼 그때, 후후…트레이너 씨…트레이너 씨이이이이이……!!]
“그때 보죠.”
그라스 원더가 트레이너 씨를 부르며 울부짖는 것이 휴대폰 너머로 들리자, 에이신 플래시는 황급히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잠시, 아주 잠시지만 그라스 원더 담당 트레이너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에이신 플래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녀의 담당 트레이너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지만, 그라스 원더 쪽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아무래도 그쪽은 나기나타는 기본에 할복용 단검은 옵션이고 가끔은 그라스 원더가 정말 전력을 다해 힘으로 짓누르기도 하기에…뭐, 자업자득이지. 에이신 플래시는 중얼거렸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에이신 플래시의 담당 트레이너다. 그라스 원더의 트레이너야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에이신 플래시로서는 신경도 안 쓰지만, 자기 트레이너는 다르다. 재미없을 정도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취미라고는 게임이나 축구 정도이며, 여자라고는 이 에이신 플래시밖에 모르는 귀여운 히토미미란 말이다.
그런 사람이 헬스의…악의 구렁텅이로 빠지려 한다니. 에이신 플래시로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간과할 수 없다. 담당 우마무스메로서 트레이너 씨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계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부드득 갈며 에이신 플래시는 다시 트레이닝을 하러 돌아간다. 트레이너 씨가 돌아와도 내색하면 안 된다. 확실하게 증거를 잡을 때까지는…현행범 체포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 * * * * * *
오후 여섯 시, 에이신 플래시는 트레센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의 뒤편에 기대어 있었다.
정문에는 에이신 플래시의 트레이너가 새삼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그라스 원더의 트레이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가지고 오는 차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자가용을 타고 가는 것을 보니 조금 먼 곳으로 가는 것이겠지.
“아직 출발하지 않은 모양이네요.”
“아, 그라스 씨.”
혹시나 그라스 원더가 늦게 오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그런 걱정은 기우일 뿐이었다. 하기야, 자기 담당 트레이너 일인데 그라스 원더가 늦거나 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라스 원더가 왔다는 것은, 그녀의 트레이닝을 끝마친 담당 트레이너 또한 곧 온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라스 원더 트레이너의 차가 트레센의 정문으로 다가왔고, 이내 에이신 플래시의 트레이너를 태우고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중앙 트레센 밖으로 나갔다.
“쫓아가요―!!”
“트으으레에에이너어어 씨이이이이―!!”
에이신 플래시가 짧게 외치자, 그라스 원더는 정신일도 하사불성의 목소리로 트레이너 씨를 외친다. 마치 최종 직선에서의 그라스 원더를 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상대는 차량이다. 하지만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마무스메의 속도로도 충분히 뒤쫓을 수 있다.
“어머…두 분, 외출 허가는―”
정문에 있던 하야카와 타즈나가 달려가는 두 명의 모습을 보았는지, 손에 서류를 든 채로 멈춰 선다. 아마도 이 망아지들을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외출계는 이미 제출했다. 늦게 제출해서 아직 하야카와 타즈나까지 보고가 안 된 것이리라. 그래도 아무튼 작성해서 냈으니 문제는 없다.
“네, 받았습니다.”
“아, 저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야카와 타즈나다. 달리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예의를 갖추어 짧게 보고한다. 하야카와 타즈나는 무섭기 때문이다. 사고를 치고 전력으로 도망가던 타이키 셔틀을 ‘달려서’ 잡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뒤의 타이키 셔틀은……별로 알고 싶지 않다.
그런 꼴을 당하고 싶은 마음은 두 망아지 모두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하야카와 타즈나 앞에서는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서열정리를 당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에이신 플래시와 그라스 원더의 모습에, 하야카와 타즈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일로 외출하는지는 모르겠지만…뭐, 뻔하지. 담당 트레이너들 때문이리라. 풋풋한 소녀들의 사랑 이야기란 얼마나 달콤한가.
……달콤한 사랑 이야기 때문에 달려가는 거 맞지?
아무튼, 괜스레 옛 담당 트레이너 씨와의 추억이 떠오르는 하야카와 타즈나였고, 두 망아지는 정문을 빠져나와 그라스 원더 트레이너의 차량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 * * * * * * * * *
“하아, 하아…여긴가요.”
“하아…후우, 역시 아스팔트를 달리는 건 지치네요.”
우마무스메 전용 도로라고 해서 잔디를 깔아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에이신 플래시와 그라스 원더는 아스팔트의 반작용을 그대로 받으며 약 3km 정도를 달려야만 했다. 다행히 둘 다 장거리 레이스 경험자인지라, 큰 무리 없이 달려올 수 있었다.
물론 트레이너 씨들이 백미러로 에이신 플래시와 그라스 원더를 봐 버리는 사태를 피하고자 적당히 속도를 조절하고 코너를 끼며 추격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덜 힘든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도 3km라는 거리는 부담이 되는 거리, 두 우마무스메 모두 헥헥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바로 여기, 이 건물 지하다. 사람도 거의 안 다니는 후미진 골목의 건물이다.
트레이너 씨들이 주차한 뒤, 이 건물의 지하로 내려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앞에 있는 입간판도 이상하다. ‘데일리 헬스’라니, 이 무슨 천인공노할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장소란 말인가.
아니 애초에 그런 업소의 간판을 버젓이 밖에 내어놓는다는 것이 말이나 된단 말인가? 두 우마무스메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하지만 한번 참는다. 간판을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트레이너 씨들을 잡아, 파렴치한 행위를 하려 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받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트레이너 씨들이 지하의 가게로 들어간 지도 벌써 20분 정도가 지났다. 이 시간이면 벌써 히토미미 아가씨들과 이상하고 므흣한 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이신 플래시도, 그리고 그라스 원더도 각자 트레이너 씨의 부정한 증거, 현행범의 증거를 잡으러 온 것이지, 다른 여자와 이런저런 에로한 짓을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난입해서 전부 족쳐버려야 하는 것이다.
여자도, 가게도, 트레이너 씨도.
천천히, 에이신 플래시는 가지고 온 사브르를 꺼낸다. 그리고 차분한 눈으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노려보며, 칼끝을 그쪽으로 겨눈다.
옆에 있던 그라스 원더 또한 나기나타를 꺼내, 한번 크게 휘두른다. 그리고 양손으로 나기나타를 들고 날 부분을 앞으로 쭉 내민다.
“에이신 플래시, 돌입합니다…!”
“그라스 원더, 갑니다…!”
입술을 으드득 깨물며 트레이너 씨를 단죄하기 위해, 두 우마무스메는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그리고 가게의 문을 쾅, 하고 열어젖히며 외친다.
“당장 나오세요, 트레이너 씨!”
“도망갈 곳은 없으니까요, 트레이너 씨이~?”
“……?!”
카운터에 있던 남성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다가 두 우마무스메의 손에 들린 날붙이를 보고 눈이 동그래지더니, 후다닥 몸을 숨기고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신 플래시와 그라스 원더는, 자기 트레이너가 어디에 있는지 열심히 눈알을 굴려 찾을 뿐이었다.
“……?”
“……??”
하지만, 그 굴러가는 눈동자에 들어온 것은…두 우마무스메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령과 케틀벨을 비롯하여 바벨, 벤치프레스, 파워랙, 스미스머신 등등…그녀들도 트레이닝 시간에 자주 쓰는 기구들. 다만, 그녀들이 쓰는 기구들에 비하면 덤벨이나 바벨 원판이 작고 아담하고 가볍다는 것 정도이리라.
그리고 그런 기구들에 히토미미 남성들이 빠짐없이 달라붙어 헛둘헛둘, 신음을 흘리며 쇠질을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에엣…….”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에 에이신 플래시와 그라스 원더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쪽에 에이신 플래시의 트레이너가 보인다. 파워랙에서 벤치프레스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그라스 원더의 트레이너가 바벨을 살짝 들어주고 있었다.
무게를 보니 양쪽 합계 60kg이다. 봉 무게는 조상님…아니, 그라스 원더의 트레이너가 들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귀엽다. 쁘띠 바벨이잖아, 귀엽다. 벤치프레스 300kg 정도는 가뿐히 치는 에이신 플래시에게, 그녀의 트레이너는 더없이 귀여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어서는 안 됐다. 상황을 파악한 즉시 모른 척하고 도망쳤어야 일말의 여지라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저질렀고, 모두의 시선이 두 우마무스메에게 쏠린 것을.
그리고 두 망아지가 중앙 트레센의 스타들임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틈에서, 에이신 플래시의 트레이너가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걸어 나온다.
“…에이신?”
그리고 옆에서는 그라스 원더의 트레이너가 마찬가지로 인상을 팍 쓰며 그라스 원더를 향해 천천히 걸어온다.
“뭐야, 그라스 네가 왜 여기 있어?”
담당 우마무스메 앞에 선 트레이너들은, 무슨 일인지 설명해 보라는 듯이 그녀들을 보았다. 두 명 다 반바지에 반 팔,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그리고 가게의 문이 벌컥, 열린다. 초록색 모자와 정장이 보인다. 범접할 수 없는 살기가, 우마무스메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감이 그녀들을 덮쳐온다.
그제야 에이신 플래시도, 그리고 그라스 원더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두 망아지는 당근 된 것이다. 아주 당근 된 것이다.
* * * * * * * * * *
에이신 플래시와 그라스 원더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느 방에서 걸어 나왔다.
트레센 외부의 헬스장, 그러니까 피트니스 클럽에서 작은 소동을 일으킨 죄로, 하야카와 타즈나 이사장 비서에게 혼나고 나오는 참이다.
분명 하야카와 타즈나는 히토미미일 텐데, 어째서인지 그녀 앞에만 서면 우마무스메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다.
개겼다간 물리적으로 뒤질 수 있다고.
뭐랄까, 할머니 소리를 들은 마루젠스키의 분노를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라스 원더는 잘 알고 있는 그런 느낌 말이다.
아무튼, 왜 황제 트레이너의 트레이너실에서 혼났는지도 모르겠다. 이사장 비서를 위한 방이 따로 있는 것은 물론 아닐진대, 그냥 기숙사나 그런 곳에서 혼나면 되는 거 아닌가? 황제의 트레이너실을 제집 드나들 듯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하야카와 타즈나는 일개 히토미미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트레이너실이 비어있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던 것일까.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이어가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앙 트레센 교정에서 총을 쏘다 걸린 타이키 셔틀만큼 혼났던 것 같았다.
하야카와 타즈나가 마지막에 말했던, ‘두 분, 사고 치지 말고 잘합시다?’라는 말이 너무나도 무서웠기 때문에,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두 망아지의 혼남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아직 사건에 휘말린 당사자들에게 혼난 것이 아니니까.
“에이신.”
“그라스.”
에이신 플래시의 트레이너와 그라스 원더의 트레이너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두 우마무스메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레이너 씨…….”
“…….”
그녀들답지 않게, 자기 트레이너의 시선을 슬그머니 회피한다. 에이신 플래시는 눈동자를 스윽 돌렸고, 그라스 원더는 아예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그런다고 있었던 일들이 없던 일로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망아지들의 말도 안 되는 일에 상당히 화가 난 트레이너들은,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에이신 플래시, 나 좀 보자.”
“…그라스 원더, 따라와. 이야기 좀 하자.”
“히잉….”
“읏……트레이너 씨.”
트레이너 씨가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에이신 플래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이 시점에서 슈퍼 갑은 트레이너 씨요, 슈퍼 을은 에이신 플래시인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라스 원더 또한 마찬가지인지, 그녀의 담당 트레이너에게 팔을 붙들려 끌려가고 있었다. 히토미미의 힘으로 우마무스메를 끌고 갈 수는 없으니, 그라스 원더에게 저항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하기야, 저렇게 담당 트레이너 씨가 화가 났는데 반항이라도 한다는 것은, 상호 간의 신뢰를 부숴버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겠지. 그라스 원더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에이신 플래시 또한 마찬가지다. 담당 트레이너 씨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은 절대로, 결단코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번 일은 실수다. 오해다. 아니 일본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당연히 그런 뜻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기, 트레이너 씨…제가 다 설명을―”
그래서 변명이라도 하려고 트레이너 씨의 눈치를 슬쩍슬쩍 보다가 입을 열었지만,
“됐으니까 따라와. 여기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네에.”
그녀 또한 그라스 원더처럼 트레이너 씨의 손에 붙들려 다른 곳으로 끌려가고야 말았다.
* * * * * * * * * *
그렇게 끌려간 곳은 의외로 트레이너 씨의 기숙사였다.
평소였다면 트레이너 씨가 먼저 방에 초대한 것에 대해 기대감을 품으며 우마뾰이 노래를 불렀겠지만, 지금의 트레이너 씨는 화가 난 상태다. 왜 여기로 왔는지 안 봐도 뻔하다.
아무리 그래도 담당 우마무스메를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혼낼 수는 없으니까, 에이신 플래시의 최소한의 명예는 지켜주고자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에이신 플래시는 눈치가 빠르다.
그래서 트레이너 씨의 방 안에 들어왔음에도, 단둘이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하는 것이다.
트레이너 씨가 무슨 말을 할까. 뭐라고 혼낼까. 혹시 ‘질렸다’라거나 ‘더는 못 참는다’라며 계약 해지를 진지하게 들이대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리고 트레이너 씨는, 냉장고에서 찬물을 한 병 꺼내어 단숨에 들이키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에이신 플래시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얼굴에 노기가 보인다. 지금만큼은 정말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인 것이다.
“어디, 변명이라도 해 봐.”
트레센 외부에서 칼을 뽑고 난동을 부리려 했던 이유를, 에이신 플래시의 입으로 직접 설명해 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트레이너 씨의 말대로 해야만 한다고 본능이 고하고 있었다.
“저기, 그게…헬스…간다고 하셔서…꼼짝없이 그런 쪽인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 쪽?”
“그게, 그…풍속…같은…….”
“……아, 그래. 일본에서는 그런 뜻이 있다고 했던가.”
에이신 플래시의 트레이너도, 그라스 원더의 트레이너도 현지인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 까먹는 것이다. 고향에서는 다 헬스 간다고, 헬스장 간다고 하면 쇠질하러 간다는 것을 다 아니까.
그러니까, 사소한 오해였을 뿐이다.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에이신 플래시를 나무라기에는 조금 그렇지…는 무슨. 칼 들고 헬스장, 그러니까 피트니스 센터 난입한 시점에서 이미 사소한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트레센 밖에서 사브르 들고 난동 피운 걸 설명할 수는 없어.”
“……네에.”
그리고 그 사실을 에이신 플래시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의 변명은 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그러한 에이신 플래시의 모습에, 트레이너 씨는 작은 한숨을 내쉰다.
뭐라 해도 에이신 플래시는 담당 우마무스메다. 소중한 담당 우마무스메이기 때문에 쓴소리는 웬만하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것도 오해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다행히도 에이신 플래시가 반성의 기미를 보이고 있기에, 모질게 말하지 못하겠구나, 속으로 중얼거린다.
게다가 하야카와 타즈나에게 한번 깨지고 나왔는데, 여기에서 추가로 더 혼내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그렇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중앙 트레센 밖에서 칼 같은 거 들고 난동 피우는 건 범죄야, 범죄. 트레센에서 잘 무마해서 다행이지…그러면 안 돼, 알겠어?”
“죄송해요, 트레이너 씨.”
“하아…….”
한숨을 푹 내쉬는 것으로 타이르는 것을 대신한다. 이 정도 했으면 알아들었겠지, 에이신 플래시라면.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에이신 플래시 또한 트레이너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자신을 더 혼내지 않을 거라는 점, 트레이너 씨는 에이신 플래시에게 무르다는 것, 그리고 사실 트레이너 씨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까지.
그야, 트레이너 씨…정말로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셨다면 축객령부터 내리셨을 거고, 애초에 트레이너 기숙사까지 데리고 오시지도 않았을 거니까요. 경험에서 나오는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트레이너 씨가 귀여워 보인다. 오늘따라 더 귀여워 보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 귀여워 보인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쇠질을 하던 트레이너 씨가 떠오르니, 귀여워 보인다.
귀여운 바벨을 들며 귀엽게 낑낑거리던 트레이너 씨의 연약한 히토미미 근육이 떠오르니, 아래쪽이 큥큥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거, 무리일지도. 에이신 플래시는 작게 중얼거렸다.
“에이신? 뭐라고 했니…?”
그 중얼거림을 듣기라도 했을까, 아니면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것일까. 에이신 플래시에게 되묻는 트레이너 씨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트레이너 씨가 전부 나쁜 거니까요. 에이신 플래시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온다.
“그런데…트레이너 씨도 잘못이 있어요.”
“내가 잘못? 무슨 말을―”
“그렇게 무방비하게 근육 트레이닝 같은 걸 하시면…어쩔 수 없게 되잖아요? 완전히 유혹하는 거잖아요? 트레이너 씨가 나쁜 거잖아요?!”
“얘, 얘 갑자기 왜 이래…?! 야, 에이신, 에이신 플래시! 멈춰! 거기서 멈추란 말이야!!”
에이신 플래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흐느적흐느적 트레이너 씨에게 다가가자, 그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손을 내저으며 뒷걸음질을 친다.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다. 에이신 플래시와 단둘인데다가 현관문은 에이신 플래시가 등지고 있고, 트레이너 씨 쪽에는 조그마한 창문 하나뿐. 퇴로는 없다. 물론, 저항해도 의미가 없다.
“트레이너 씨의 이두근이 꿈틀대는 것도, 광배근이 펄떡이는 것도, 그러면서 살짝 땀의 냄새가 나는 것도, 전부 유혹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우마무스메라면 어쩔 수 없는, 그런 유혹 말이에요.”
“아니, 그렇다고 왜 갑자기 급발진―”
“꼴리게 한 책임을 지시란 말이에요!”
덮쳤다.
트레이너 씨가 버둥대지만, 이미 흥분 기미인 에이신 플래시를 막을 수는 없다. 인간이 우마무스메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종국에는 트레이너 씨도 포기하신 듯, 한숨을 내쉬며 에이신 플래시를 안아주며 말한다.
“한 번만이야.”
“무슨 소리인가요, 트레이너 씨. ‘서로’ 만족할 때까지인 게 당연하잖아요?”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건데, 이 뾰이에 미친 말딸아!”
“그게 순애니까요.”
“…….”
에이신 플래시의 당당한 헛소리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 * * * * * * * * *
다음 날, 그라스 원더의 트레이너는 그의 가슴팍에 달라붙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는 담당 우마무스메, 그라스 원더를 곤란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이래서야, 뭘 할 수도 없고 돌아다닐 수도 없다. 하지만 그라스 원더가 이렇게까지 달라붙는 것도 굉장히 드문 일이기 때문에,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어울려 줘야 한다는 것을 안다.
어제는 얌전히 혼이 나더니, 무엇 때문에 이상한 스위치가 켜져서 어제부터 이런 상황이 된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꼬리를 살랑살랑, 귀를 쫑긋거리는 것을 보니 기분은 좋은 것 같다. 이쪽은 죽을 맛인데 말이다.
하여간, 이래서 담당 우마무스메에게 운동하는 것을 보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도 그라스 원더가 선은 안 넘는 아이라 다행이지.
하지만 그런 생각도, 출근하고 있는 에이신 플래시의 트레이너를 보는 순간 싹 달아났다. 저쪽은 선을 넘다 못해 선이라는 개념이 없는 쪽 아닌가.
초췌한 몰골로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는 후배의 몰골에, 그는 마음속으로 깊은 애도를 표했다. 누가 봐도 한계까지 몰린 상태다.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다.
그래, 저런 꼴 보다는 이게 낫지. 아직도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그라스 원더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러더니 그라스 원더의 머리를 토닥인다.
서늘한 바람이 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라스 원더의 꼬리가 발딱 선다. 하지만 그는 담당 우마무스메의 변화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 멀리 다른 후배, 골드 시티의 트레이너가 보인다. 나리타 브라이언의 트레이너도 보인다. 두 사람의 잡담이 여기까지 들린다. ‘오랜만에 운동 좀 하고 싶은데, 어때?’ ‘좋지. 간만에 하체 좀 할까?’. 그 소리를 듣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딘가에서 그들의 담당 우마무스메가 그 소리를 듣고 있으리라. 그리고 아마, 이렇게 담당 우마무스메가 딱 달라붙는 결말…이면 다행이겠지. 속으로 미리 애도를 표한다.
중앙 트레센의 가을이었다.
==========
X스
* * * * * * * * * *
이런거 볼 때마다 뚱뚱뚱뚱뚜루둥하는거 머릿속에서 소리 지원됨ㅋㅋㅋ
담당 우마무스메와의 우마뾰이는.. 괜찮은건가
그나저나 꼬리가... 발딱...
저기도 얼마 남지 않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