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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사장.. | 20:13 | 추천 7 | 조회 67

일본 검술과 일본도에 대한 조상님들의 평 +6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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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 군사는 돌격전을 벌여 마구 덤비는 데만 능할 뿐이고 

예리한 검을 활용하는 데는 도저히 왜놈만 못하다. 



-조경남 『난중잡록 정묘년』







우리 수군 다섯이 왜나라 소년 검사 한명을 당해내지 못한다.


-이순신 『난중일기』







왜적은 실로 상대하기가 어려우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왜적은 철환(조총)을 비 오듯 퍼붓는데 한번 맞기만 하면 

곧바로 쓰러지고 근접해서는 칼을 사용하는데, 

그 검술이 지극히 기이하니 이들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고 하겠다. 



-조익 『포저집』 






이번에 귀순한 왜인(항왜) 중에는 검을 잘 쓰는 자도 있고 창을 잘 쓰는 자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검술이 전해 오지 않았는데, 이는 만세에 유익한 일이다.



-『선조실록』 1594년 7월







훈련대장 유혁연이 말하기를, 

"검술은 천하 어디에도 있지만 일본 것이 최고입니다. 

우리 나라는 홀로 전하고 익히는 자가 없어 신의 마음이 항상 분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신의 아랫사람(김체건) 중에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을 보내 검을 배우게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보내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숙종 5년(1679) 7월 27일







칼을 쓰는 묘리는 왜인들이 최고이다. 

왜의 달인인 아이스 히사타다(愛洲移香)의 검술을 카게류(陰流)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군교(軍校)인 김체건이 일찍이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갔다가 

그 방법을 배워 와서 지금까지 유전하니, 이른바 왜검이라는 검술이다.



-『병학지남연의』






이미 칼을 빼들고 접전해 와서 갑자기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이때 명의 이여송이 인솔하던 군사는 모두 북방의 기마병으로 

화기가 없고, 짧고 무딘 칼을 가지고 있었다. 

적의 보병들은 모두 3, 4척이나 되는 긴 칼(노다치로 추정)을 가졌는데 날카롭기가 비길 데 없었다. 

그들과 충돌하여 싸울 적에 좌우로 후려치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져 그들의 예봉을 감당할 자가 없었다.



-유성룡 『징비록』 벽제관 전투 (명나라 기병대가 칼든 왜군 보병들의 기습에 대패함)







병조가 아뢰기를 "칼을 잘 쓰는 것이 단병전에서의 가장 중요합니다. 

일본과 절강성은 이것으로써 천하의 강병을 만들었습니다."



-『인조실록』 1630년 1월 6일






백광언 등은 적(왜군)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육박해 들어가 도전했는데, 

묘시부터 사시에 이르기까지 적병이 잠복하고 

나오지 않자 오시에 이르러 아군이 해이해졌다. 

이때 왜적이 풀 속에 엎드려 무릎으로 전진해 와 검을 휘두르며 

일제히 일어나 아군 가운데로 쳐들어오니, 

왼쪽에서 목 베고 오른쪽에서 찍어대고 하여 

아군의 전사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지시, 백광언, 고부 군수 이광인, 함열 현감 정연 등이 

모두 이 전투에서 피살되어 대군의 기세가 꺾였다.



-조경남 『난중잡록 임진년 상』







항왜(투항한 왜군)들이 칼을 잘 써서 우리 나라 살수를 보고 아이들 놀이와 같다고 하였고, 

이들은 칼과 총을 주조하는 법을 안다 하는데 

이들 왜인을 어찌하여 머물러 두고 이들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지 아니 하는가? 



-『선조실록』 1594년 8월 2일






비망기로 일렀다. 

"우리 나라 습속은 남의 나라의 기예를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더러는 도리어 비굴하게 여긴다.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 훈련도감에 이르러 배우도록 하라."



-『선조실록』 1594년 12월 27일







정원에 전교하였다. 

"전세가 위급한 창졸들간에 단병으로 접전하는 데 있어서는 검술만한 것이 없다. 

앞으로는 모든 군사들로 하여금 검술을 익히게 하고, 

시재할 때에도 검사를 충분히 뽑도록 해야한다."



-『선조실록』 1596년 12월 5일







그들(왜군)의 무기는 칼과 총을 제일로 친다. 

칼을 찬 자는 반드시 길고 짧은 두 개의 칼을 차서 긴 것은 치거나 찌를 때 사용하고, 

짧은 것은 던져서 남이 뜻하지 않은 사이에 맞히면 당장 죽지 않는 자가 없다.



-신유한 『해유록』







왜군이 칼을 휘두르는 사이에 칼등으로 칼날을 받아쳐서 결국 다치지는 않으니, 

그 교묘하게 피하는 기술과 능숙하게 부딪치는 기술은 완연히 백원의검법이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장검(長劍)과 철환(鐵丸) 입니다. 

근접 무기가 신묘하여 사람마다 검객이 아닌 자가 없고, 

기계의 정밀함도 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환은 비가 내리듯이 쏟아지고 칼은 숲이 서 있는 것과 같으나, 

총을 쓰는 것은 칼을 쓰는 것에 비해 자못 뒤떨어집니다. 



-정탁 『약포집』 1593년 8월 15일. 명나라 유생 호환에게 보낸 편지







홍병구가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유성룡은 제찰사가 되어 오랫동안 절강병법(북방 유목민족의 기마병 보다, 남부 왜구를 상대하는데 적합한 척계광의 병법)의 진중으로 있으면서 육박전을 벌일 때 

검술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익히 보았기 때문에 

검술을 긴요하게 사용하는 계첵을 선조께 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조께서 매우 옳게 여기시어 금위 하는 장사들에게 모두 검술을 익히게 하였습니다"



-『승정원일기』 1629년 4월 14일







병조가 아뢰기를 

"어느 전투이건 간에 승부는 모두 단병(短兵)으로 육박전을 벌이는 데에서 결판이 납니다. 

왜병과 호병을 보면 모두 검술을 알고 있습니다.

육박전을 벌일 즈음에 네 가지 기예(창, 활, 총, 기마술)가 

모두 쓸모 없어지게 되면 반드시 차고 있는 칼을 가지고 사생을 결단하려 덤빕니다.



-『인조실록』 1628년 9월 29일







왜군들은 전투시에 멀리 있으면 총을 쏘아 맞히고. 

가까이 있으면 칼을 뽑아 돌진하니 이 때문에 천하에 그 칼끝을 당할 자가 없었다. 

그래서 명나라의 척계광 장군이 왜를 방어함에 있어 

총으로 총을 대적하고 검으로 검을 대적하도록 하였으나, 

여전히 왜적의 검술을 대적 하기에는 부족하여 

반드시 낭선과 창으로 방패와 칼을 옹호 하도록 하였다.



-최기남 『무예제보번역속집』 







명나라 군에서 백고초기(白高招旗)를 세우면 

각 도수(刀手)는 모여서 대기하는데, 

모두 갑옷을 입는다. 북 소리가 들리면 몸을 날려 

왜도(倭刀)의 용법대로 머리를 낮추어 말의 다리를 베고, 

몸을 일으켜 말의 머리를 베는 두 가지 도법(刀法)을 익혔다. 



-『무비지』







왜이(倭夷)는 보통 호접진(蝴蝶陣)을 치는데, 

전투시에는 부채를 휘두르는 것으로 호령을 삼는다. 

한 사람이 부채를 휘두르면 무리들 모두가 칼을 춤추며 

일어나 공중으로 칼날을 번뜩이며 재빨리 휘두른다.

우리 병사들이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가는 한 칼에 베여 버린다. 

칼은 위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아래를 공격하기 때문에 막기가 어렵다. 

표창과 단도는 자루를 드러내지 않고 갑작스럽게 던지는 까닭에 예측할 수 없다.



-『주해도편』 왜국사략







왜나라가 만드는 칼인데 단련이 정교하며 만듦새가 가볍고 

예리하니 다른 지방의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검신의 빛나는 광채가 눈을 쏘아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며, 

검술은 좌우로 도약 하는데다 기이한 방법으로 공격 의도를 숨기니 눈으로 헤아릴 수 없다. 



-『단도법선』 단도설(?刀?)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은 반드시 권총을 소지해야 했다. 하지만 권총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칼을 든 일본인에게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말하자면 콜트 리볼버는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 중 최악의 무기다. ... 베기 성능의 중대한 결함 때문에, 우리의 칼은 직전에 미리 공들여 칼날을 갈아놓지 않으면 열 번 중 아홉 번은 공격에 실패한다."


'on Military Equipment,' Journal of the Royal United Service Institution. 1879


"그들은 칼집에서 칼을 뽑는 동시에 위력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한 거리에서 칼을 맞게 된다."


Rev. J. G. Wood, 『The Natural History of Man』, 1870


"숙련된 일본 검사는 칼을 뽑는 순간 상대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 수 있다. 공격자가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방어할 기회는 없다고 보면 된다. 내가 들은바에 의하면 일본인에게 난도질당한 어떤 수병은 한번 베일 때마다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갔다고 한다."


Alexander Michie, 『The Englishman in China』, 1900


"... 콜트 리볼버의 작은 탄환구경과 지나친 관통력에 대해 지적하자면, 이건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인데, 한 일본인은 콜트 리볼버로 가슴에 총알 두 방을 맞은채 반격해서 두 명의 유럽인을 살해하기도 했다. 희생자 중 한 사람에게 열여섯 개의 상처를 입혔으며,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것이었다."

'on Military Equipment,' Journal of the Royal United Service Institution. 1879


참고로 검술은 익히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거야 일대일 결투 상황을 전제로 배우는 고위 무사들에게나 그런 것이고, 일반 병사들에게는 군사용으로 중요한 부분만 추려서 교육하거나 아예 시현류/자현류같이 충격보병들을 위한 검술 유파가 따로 있을 정도임


또한 장창이 등장한다 해도 군도의 중요성이 전장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님(사실 조선군은 장창을 안 썼다만)

혼전 상황이나 육박전에서는 이루 말할 것도 없이 검의 중요성이 일순위였고, 대기병전에서도 노다치나 클레이모어, 츠바이헨더 같은 양손 장검이 중기병 카운터를 위해서 투입될 정도였음


상대방의 진영 해체를 위한 충격보병들에게도 검 만한 것이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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