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게 실시간 커뮤니티 인기글
종합 (4050807)  썸네일on   다크모드 on
츄팝춥스.. | 15/03/15 01:54 | 추천 105 | 조회 7183

[BGM有] 조선 남성 복식을 알러 온 낯선 자여. 환영하오. +3102 [16]

오늘의유머 원문링크 https://m.todayhumor.co.kr/view.php?table=bestofbest&no=200478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IHvO7



지난 링크는 여깁니다!

▽▼▽

[BGM有] 여러분 청나라 복식 안궁금하세요?
[BGM有] 여러분 이번엔 당나라 복식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청나라 복식과 당나라 복식으로
베오베에 갔던 여징어 다시 인사올립니다. ㅇ▽ㅇ

죽지도 않고 또온 이유는...
manipulate_img(this)
....

네 그렇습니다.

애초에 저한테 당나라 복식 이후로 다음은 없었는데

이 기대에 찬!!
이 댓글!!!

잉여시간이 남는 주제에
요 사이 조금 바빴던 탓에
이렇게 잊혀질만 하니 다시 나타났습니다.
(수줍

아무튼 이번에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른 어디도 아니오.

한반도 전통 복식,
그것도 남성 복식을 대충 정리해 나타났습니다.

자료들을 짜집기하고
사진편집만 해서 작성한 글이니까

틀린 부분이 있더라도 둥글게 말씀해주시면 감사 할 것 같아요!

아무튼 이제!
한국의 남성 복식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ㅇㅅㅇ)9


한국의 전통 복식, 그러니까 한복의 아름다움은 단연
아름다운 선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manipulate_img(this)



직선과 곡선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한복
북방민족의 의복에서 영향을 받아 발전해 온 전통 복식입니다.

한복의 아름다움을 다른사람,
특히 외국인들에게 소개할 때 우리는 흔히
여성들이 입는 한복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곤 합니다.



manipulate_img(this)
왼쪽위에서 부터 시계방향으로 대례복, 활옷, 대례복, 당의



여성 한복의 아름다움은 단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흰 동정, 얌전하게 맨 옷고름 곱게 염을 들인 저고리와
섬세하게 수를 놓은 치마, 걸을 때 흔들리며 아름다움을 뽐내는 노리개.
검은 머리를 단정히 빗고 거기에 비녀와 떨잠, 채를 꽂아 단아한듯 화려하게 꾸민
머리모양. 그 아름다움을 누가 감히 모자라다 하겠습니까마는



manipulate_img(this)
왼쪽에서부터 순서대로 철릭, 두루마기, 학창의



청렴과 충절을 나타내듯 수수하고 그러나 올곧고 조화로운 미를
가진 남자의 한복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집니다.

오늘은 누누이 입이 닳도록 이야기 했던 여성 한복이 아니라
남성한복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조금 지루하더라도 자료를 모은 정성을 생각해주시면서ㅠ
봐주세요!




1. 두루마기

manipulate_img(this)


아마도 많은 분들이 남자 한복이라고 하면
이 두루마기를 많이 떠올리지 않으실까 합니다.

소매가 좁고 발목에서 20~25cm정도 올라오는 길이의
이 두루마기는 '두루 막혔다.'라고 해서 두루마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하네요. 주의周衣라고도 하는 이 두루마기는

도포와 창의가 점차 사라지면서 그자리를 대체하듯
일반적으로 자주 입는 포제袍制입니다.

고구려 시대 때부터 원형으로 보이는 것을 찾을 수 있는 이 두루마기는
원래 양반들은 방한용으로 껴입거나 외출할 때 겉옷에 받쳐입는 용도 였고
소매가 넓은 포를 입지 못하는 평민들의 외출복으로 이용되다.

고종때 갑신 의복개혁 때 양반들의 외출복으로 입도록 했고
그에따라 보편적으로 남성 한복을 대표하는 옷이 되었습니다.

계절에 따라 면, 견, 수직을 이용해 만들고
곁겹, 홑겹으로 만들어 입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2. 창의

manipulate_img(this)


창의는 도포와 두루마기의 중간 형태로 볼수 있는 의복으로
이 옷을 보면 왜 두루마기가 '두루 막혔다.'라고 해서 두루마기인지 볼 수 있습니다.
위 사진을 보면 공통적으로 옷감이 나뉘어져 있어 트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뒷중심선혹은 겨드랑이 트임(옆트임)이 있는 옷을 크게 창의라고 구분짓고,
이 창의는 형태에 따라 소창의, 대창의, 중치막으로 나눕니다.


manipulate_img(this)


소창의는 길이가 짧고 소매가 좁으며 옷이 세자락으로 나뉘어져있는 형태입니다.
양반들은 이 소창의를 활을 쏘러갈 때나, 말을 타는 등 활동적인 일을 할 때 입곤했고
보통 양반들을 시중드는 사람들이나 하급관리들이 자주 입어서

역사기록에서는 하급관리를 '창옷짜리'라고 부르는 것도 찾을 수 있다고 하네요.


manipulate_img(this)
적절한 대창의 이미지를 찾지 못해서 학창의로 대체합니다.

대창의는 소창의 보다 소매가 넓고 그 길이도 길며
옆트임과 뒷트임이 있는 옷입니다.

소매의 주머니처럼 이루어진 부분, 공태가 도포보다는 좁으며
소창의에는 없는 무가 있는 형태로
사대부들은 관복 아래에 받쳐입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평민들의 외출복으로 사랑받았던 옷입니다.


manipulate_img(this)


이 사진을 보시면 소창의와 대창의의 다른점을
더 확연히 보실수 있습니다.


manipulate_img(this)


글만으로 보시면 도대체 뭐가 뭔지 헛갈리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대충 알아낸 대로 적어 넣어 왔습니다.
소창의에 없는 '무'는 이 뒷길 아래에
다른 천을 넣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위에 대창의 이미지대신 대체한 학창의의는 대창의와 형태는 같지만
덕망있는 학자들만이 입던 옷으로 흰색옷감으로 만들고
앞단, 도련, 소매에 5~6cm검의 선을 댄 옷입니다.


manipulate_img(this)

중앙대학 어느 과에서는 이 학창의를 졸업할때 입는 로브 대신으로 입는것 같은데
여기에서 입은 학창의는 뒷트임이 없고 또 청색띠를 둘러서
정확히 고증에 따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름다운 멋이 느껴지네요. :)


manipulate_img(this)
위는 지난 06년도에 발굴된 400년전의 중치막, 아래는 17세기의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중치막



중치막은 조선 초기에 명나라에서 들어온 중단이 변형된 형대
임진왜란 이후에 사대부들이 외출시에 자주 입었던 옷입니다.

외출복 뿐만 아니라 조복이나 겉옷의 받침옷으로 입던 이 중치막은
소창의와 다르게 옆트임과 뒷트임이 있으나
대창의에는 있는 무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중치막과 대창의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지만
형태와 또 흥선대원군의 기록에 따라 둘을 다른것으로 분류하는 것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현존하는 유물중에 가장 많이 찾아 볼 수 있고
풍속화에서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이 사랑 받았던
의복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3. 도포

도포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심의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네요.

manipulate_img(this)


심의는 도포 이전에 남성들이 예복으로 입었던 옷으로 흰천으로 만들고
소매와 옷깃같은 옷의 가장자리에 검은 천을 대어 입는 것을 말합니다.
길이는 복사뼈까지 올 정도로 긴 길이었고
의와 상이라고 해서 두부분을 만든뒤 이어붙이는 형태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이 심의를 입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고,
조선조 예종이 이 심의를 입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왕과 사대부가 이 심의를 입었던 이유로는 주자가 이 심의를
법복으로 추대했다는 기록에 근거를 두고 유교를 숭상하는 문화에 의해서
널리 입었다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심의는 조선조에 들어서면서 도포에게 사랑받는 의복의
위치를 내어주게 됩니다.


manipulate_img(this)

심의는 만드는데 도포보다 손이 많이 갔기 때문
그 자리를 도포가 대체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도포는 위에서 설명한 대창의와 같이 옆트임이 있고,
길 아래에 한폭의 천을 덧 대는 건 같은 방식이이지만 뒷트임이 없습니다.
창의와 도포 뒷길에 이렇게 천을 덧대는 것은 움직일 때, 혹은
말을 탔을 때 옷자락이 움직여 속에입은 바지가 뒤에서 드러나지
않기 위해 덧대놓았다고 하네요.

초기에는 백색과 청색 천으로 만들어
평상시에는 백색을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청색의 도포를 입었지만
차츰 여러색의 천을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manipulate_img(this)
네. 저 좋으라고 넣는 짤입니다.


이 도포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왕이나 군만이 입을 수 있던 특권층의 옷이었지만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에서 부터는 사대부 남자들이 입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고
정조에이르러서 비로소 평상복이자 유생들의 공복, 제복으로 정착하기에 이릅니다.

더 나아가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하층민이 도포를 입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고 하네요.

도포는 글읽는 선비들 즉, 사인士人들의 옷이지만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따르면 무인들이 입던 직령포
기원으로 하고 있는 옷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글 읽는 사인들의 옷이 무인들의 옷인 직령포에서 유래했다니
그것도 참 재밌는 사실이지 않나요?




4. 융복


융복은 갑주, 군복등의 광의철릭을 입고
칼과 그외의 의복을 갖추는 협의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 융복에 대해 이야기 하기전에 도포의 기원이라고 알려져 있는
직령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네요.

manipulate_img(this)
단령과 직령포


직령, 직령포는 옷깃이 곧다는 뜻입니다.
관복으로 우리 선조들이 입으셨던 단령을 보시시면 둥글게 목선이
파인것을 볼 수 있는 반면에 오른쪽의 직령포를 보시면 동정과 깃이 달려있는
목선의 모양이 둥글지 않고 올곧게 뻗은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단령은 중국에서 들어온 복식으로 우리의 전통적 복식이 아니고
직령포가 우리의 전통적 복식 형태입니다.


갑주
manipulate_img(this)
두석린갑

융복의 광의에 속하는 갑주는
수은갑, 유엽갑, 피갑, 지갑, 쇄자갑, 경번갑, 두정갑, 두두미갑등
여러 종류로 나뉘었습니다.

조선 초에는 찰갑이라고 해서 철이나 가죽으로 만든 것이
가장 많았고 그 형태는 고구려때 쓰던 찰갑의 양식을 계승한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찰갑 이외에 쇄자갑, 경번갑, 두두미갑같은 갑옷도 찾을 수 있고,

manipulate_img(this)
두정피갑

임진왜란 이후에는 갑옷의 장단점을 따져 실용성이 좋은
두정피갑이 유행하게 되는데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이 갑옷은
원나라의 갑옷 형식을 그대로 따르는게 아니라 실용성있게 변형되고
재료와 문양이 달랐다고 하네요.



쾌자
manipulate_img(this)
화보는 차마 진짜 부부라기에 갈라놓지 못하고...여성분도 함께 모셔왔습니다.(깊은 한숨


아무튼 사진상에서 남자분들이 입은 소매없는 겉옷을 쾌자라고 하는데
쾌자이외에도 답호, 작자, 더그레, 호의라고도 불렸던 이옷은
군복의 일부였다가 차츰 무관과 문관을 가리지 않고 평상복으로 입었던 옷입니다.

정약용의 아언각비를 보면 쾌자는 괘자가 잘못 알려졌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옷은 왕과 왕세자, 왕자를 가리지 않고 두루마기위에 입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남자 아이들의 돌복으로 입혀집니다.

라고는 하는데 돌잔치를 안가봐서 모르겠네요.
혹시 어느분 돌잔치 갔다가 아이들이 쾌자 입을거 보면
아이고 쾌자가 참 잘어울리는 구나(쓰담쓰담 해주고 오시면 되실듯 합니다.


철릭
manipulate_img(this)
저 좋으라고 올리는 짤2222


여기서 한가지 문제 나갑니다!
철릭은 한벌 이다 아니다! OX로 정답을 맞춰보세요!

두구두구두구두구~





철릭은 두벌로 만든 한 벌 옷입니다!

상의와 하의를 따로 만들어 허리를 고정시키는 형태의 철릭
조선조 왕을 비롯해 문무관들이 착용하던 직령포로
하의인 상에 주름이 잡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철릭은 첩리, 천익, 철익등으로 표기 되어있기도 한데
초기에는 겉옷과 밑받침 옷의 구분이 있었고 또 궁중의 사람들이 입는것
무관만이 입는 것 마다 다른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차츰 하나의 표기
굳어진 것 같습니다.

고려 중엽부터 입은 것으로 보이는 이 철릭은
왕이 바깥으로 거동할 때 위군사들이 착용해야 하는 옷이었고
무관들이 몸을 움직이기 쉽게 하기 위해서 입었던 옷이었습니다.


manipulate_img(this)

무관들만이 융복으로 입던 이 철릭이 문관들에게도 선호된 시기는
전란이 잦던 병자호란 이후라고 합니다.

소매도 처음에는 넓은 형태였지만 차츰 좁아져
조선 후기에 이르러 지금 우리의 저고리 소매만큼 좁아졌다고 합니다.


구군복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제가 이글을 쓰는 이유는 오로지...
위에서 언급한 철릭과

manipulate_img(this)

이 구군복!! 구군복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복의 섹시함은 유교사상이 강했던 조선에서도 얄짤 없는 겁니다!!

manipulate_img(this)
보십쇼! 뒤태까지 섹시한!!! 이런!!!

...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했네요...
아무튼

구군복은 갑주안에 입기도 했던 무관의 대례복으로
모자인 전립, 검은 두루마기에 붉은색 안감을 대고 붉은 소매를 단 뒤
옆 솔기를 튼 동달이, 소매와 깃이 없으면서 뒤트임을 준 전복, 광대와 전대를 가슴에 두르고
신분증인 병부를 차고, 가죽으로 만든 화살통인 동개를 맨뒤
수구와 환도, 등채를 들고, 사슴가죽으로 만든 신인 목화를 신는 차림을 통틀어 구군복이라고 합니다.

manipulate_img(this)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광대, 전대, 전복, 동달이


이 구군복은 무관이 최고의 경지에 올랐을 때 할 수 있는 차림이었지만
왕이 행차를 할 때에는 문관과 무관 모두 구군복 차림을 했습니다.

고종시절 을미개혁을 하면서 신식군복을 들여와
육군복장규칙을 세우면서 자취를 감췄지만

지금! 경복궁에 가면! 이 구군복 차림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manipulate_img(this)

걸어 나와도 멋있고 가만히 서있어도 섹시하며
흙먼지가 날리는 가운데에도 품위가 있어서 오바마 대통령도 반한 구군복!!

정말 구군복은 더럽...The Love
내 마음속 10점 만점에 100만점 ㅠㅠㅠ

그러니까 여러분 한복의 아름다움을 설명할때
꼭 구군복을 소개하세요...진립니다...진짜로...



아무튼 이만큼 길게 왔으면 다 끝났어야 할 것 같은데 저한테 자료가 남았네요?
manipulate_img(this)


이어서 갑니다!


5. 신발


manipulate_img(this)
왼쪽에서 부터 순서대로 석, 화, 이

신발은 그 모양과 용도에 따라 석?, 화靴, 이履로 나뉩니다.

석은 왕과 왕비가 예식에서 신는 신으로 겹창으로 이루어 져 있으며
붉은색이 일반적이고 가장자리에 검은 선을 두르고 수를 놓아 장식하는 형태였습니다.
왕의 조복인 강사포에는 흑색의 석을 왕비의 대례복에는 청색의 석을 신었다고 전해집니다

화는 이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모양으로 신목이 붙어있는 형태
신라에서는 이 화에 귀금속 장식을 하는게 유행이었고
고려에서는 관복을 개정하면서 흑피화를 신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여러 기록에서 흑피화를 왕과 왕비, 왕세의 공복이나 법복에
흑피화를 신을 기록이 있고 조선말기에는 흑피화 대신 목화를 많이 신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화와 달리 신목이 없는, 우리가 아는 고무신 형태의 신을 이야기 하는데
조선 전기에 흑피혜와 흑리를 관복에 함께 신었던 기록이 있고,
이후 부녀자들의 사이에서 당혜나 운혜로 발전 되기도 했습니다.


6. 모자

manipulate_img(this)
어떤 은혜로운 분의 덕으로 수고를 좀 더네요.
위 그림은 신분의 순서 상관없이 나열되어있지만
전통적으로 어떤 모자를 써왔는지 대략적으로 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하면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아서...
이쪽의 검색 기능을 이용해 주세요...


7. 각대와 대


각대
manipulate_img(this)


관리들이 관복에 갖춘다해서 품대라고도 불린 이 각대는
품계에 따라 그 재질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1품에게는 혼례복에도 쓰였던 서대
정 2품은 삽금대 종 2품은 소금대
정 3품은 삽은대 종 3품과 4품 은 소은대
5품에서 9품까지는 흑각대를 썼습니다.

서대는 무소뿔, 삽금대는 보상화문을 새긴 금색 띠
삽은대는 역시 보상화문을 새긴 은색 띠 소금대와 소은대는
무늬를 넣지 않는 띠를 말하고 흑각대는 검은 무소뿔을 이용하는 것이었다고 하네요.

이 대는 관복 허리에 겨드랑이 아래 소매의 진동과
무 사이에 옷감이나 실을 이용해 끈이나 고리를 만들어
고정시키는 형태였습니다



대(띠)
manipulate_img(this)
왼쪽에서 부터 세조대, 동다회, 광다회, 교대


이 띠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의복이 없다고 봐야 할 만큼 다양한 의복에 사용되는데요.
벨트의 역할을 했던 띠인 이 대는 관복용과 편복용으로 나뉘고

세조대는 견사를 여러겹으로 합사한 끈으로 둥글고 가는 모양으로
도포, 창의같은 곳에 가장 많이 이용되었고
굵기는 0.8cm 길이는 대개 370~400cm입니다.
품계에 따라 당상관은 홍색, 자색을 쓰고, 당하관은 청색, 녹색
서민은 흑색을 쓰고, 상주는 백색을 썼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동다회는 세조대보다 굵고 납작한 모양에 끝에 딸기술을 맺어 달고
간편하게 입는 관복용 포에 사용하며 역시 계급에 따라 색을 달리했고

광다회동다회보다도 폭이 넓으며 문, 무관의 융복에 쓰는 띠입니다.
안타깝게도 광다회를 짜는 기법이 단절 되었지만 기본 12사 광다회를
만드는 기법을 일본에 가서 배워온 분이 있어 다시 그 기능을 전수하고 있다고 하네요.

교대는 상복에 매는 삼띠로 상복에 따라 그 재질을 달리했고
염을 할때 수의에 두르기도 하기 때문에 오색실로 만든 것이 출토 되었다고 합니다.



8. 보와 흉배

manipulate_img(this)
위는 용보, 아래는 흉배

흉배는 왕이나 왕세자, 왕비만이 사용하는 보로
왕이나 왕세자는 원형의 보에 금실로 용을 수놓고, 왕비는 봉황무늬
넣었고, 가슴, 등, 양어깨에 네개를 부착하며
왕의 용은 발톱이 다섯, 왕세자는 발톱이 넷이었다고 합니다.

위 사진은 오조룡을 수놓은 오조룡보입니다.

흉배는 백관의 단령포에 사각형모양으로 수를 놓은
것으로 관품에 따라 넣는 무늬가 다르고 여러번 변경되었다네요.

manipulate_img(this)
거북 흉배와 운학 흉배


세종때 이 흉배의 제정이 처음 논의 되었는데
그때에는 황의께서 검소한 기풍에 위배된다 해 반대한 기록이 있고
단종때 양성지에 의해 처음 변경된 기록이 있는데
대군은 기린, 도통사는 사자, 제군은 백택, 문신 1품은 공작
2품은 운학, 3품은 백한, 무신은 1품과 2품 모두 호표, 3품은 웅표,
대사헌은 해태로 정하고 3품 당상관 이상만 흉배를 붙이게 했지만

연산군에 이르러 사슴, 멧돼지, 거위, 기러기등의 문양을 추가
9품까지 흉배를 붙여 품계를 구별하게 했다가
영조때에 다시 간략하 한뒤 고종때까지 시행했다고 전해집니다.






manipulate_img(this)

이렇게 패기 만만하게 잉여로운 시간을 죽이자고 시작한 글이
마무리 되려니 지쳐 쓰러질 지경이네요...

이렇게 저의 토요일은 사라지나 봅니다...

하지만 뿌듯하긴 하네요...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열심히 일요일을 불사르기로 하고
이 여징어 물러갑니다!

여러분 좋은 주말 되세요!!!




또...

또 볼까요? 우리?...


[신고하기]

댓글(0)

이전글 목록 다음글

12 3 4 5
    
제목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