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게 실시간 커뮤니티 인기글
(1773208)  썸네일on   다크모드 on
예맨으로.. | 19/02/22 04:43 | 추천 52

엄복동보다 조선농구가 더 대단했음 +873 [25]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031437126

대부분의 선진 문물은 일본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지만 특이하게 농구만큼은 한국이 먼저 접했다.

1907년, YMCA를 통해 미국 선교사들이 농구를 보급해준 것이다.

성능좋은 미국 응디 ㅁㅌㅊ?

일본에 농구가 소개된 것은 1908년의 일이다.

조선농구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미국인들로부터 직접 농구를 배운 조선인들과 달리, 일본의 경우는 농구를 연구한 일본인이 보급했다는 점이다.

그가 바로 오오모리 효조라는 인물이다.

그는 나중에 가노 지고로(유도 창시자)와 함꼐 일본올림픽위원회를 창설하고 1912년 올림픽 대표팀 감독도 역임했다.

오오모리도 대단한 인물이지만 그의 농구는 미국인이 직접 전파한 게 아니라 일본인의 눈을 통해 재해석된 농구였다.

일본농구는 기본적으로 "키가 큰 사람이 하는 스포츠"였다.

반면 미국인들은 조선인 학생들의 체격이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세로로 뛰는 농구가 아니라 가로로 뛰는 농구를 가르쳤다.

그래서 풀코트 프레스가 조선농구의 밑바탕이 된 것이다.

1919년부터 총독부는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에게 농구를 장려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1920년대에는 풍부한 자금 지원과 국제경험을 갖춘 일본농구가 우세했다.

조선농구는 일본농구를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선의 농구인들은 미국인들에게 직접 배운 선진 전술을 연습하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당시 조선농구에서는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 양대산맥이었다.

일본농구의 명문팀은 도쿄대, 와세다대, 릿쿄대, 쿄토대 등이었다.

일본농구의 자존심은 일본에서 제일 권위가 있는 천황배 전일본 선수권대회를 보성과 연희가 휘젓는 사태를 지켜보며 산산히 무너졌다.

1936년에는 연희가 우승했고 (1937년은 와세다) 1938. 1939, 1940년은 3 연속으로 보성이 우승했다.

1941년에는 일본의 릿쿄대학이 우승했는데 릿쿄대학 농구팀 주전들 중 4명이 조선인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릿쿄대학과 대결한 팀은 다름아닌 연희전문학교였다.

즉, 코트에서 뒤는 10명의 선수들 중 9명이 조선인이었음 ㄷㄷㄷ

1942년부터 전쟁이 가속화 되면서 천황배 대회는 중지되었고 1947년에 다시 개최되었다.

천황배 대회는 지금까지도 개최되고 있다.

해방을 맞아 이제 조선농구도 국가를 대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등장한 조선농구의 선구자들 한분이 바로 명선수이자 명감독, 그리고 한국 최초의 농구이론가였던 이성구 감독이다.

이성구 감독 또한 현역시절 풀코트 프레스를 구사하여 일본팀들을 이겨왔다.

한국농구는 이성구 감독의 지도 아래 비장의 무기코트 프레스를 앞세워 1948 런던올림픽에 출전했고

남자부 농구 8강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당시 한국의 4 진출을 막은 팀이 다름아닌 중공이었다.

이성구 감독은 2002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정말 드라마틱하다.

2002 아시안게임 남자부 농구 결승에서 남한팀이 중공팀을 연장전 끝에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올렸다.

당시 몸상태가 매우 위독하던 이성구 감독은 한국팀이 기어이 중공팀에게 이기는 그 순간을 지켜본 직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두줄요약

1. 엄복동보다 조선농구가 더 대단했음

2. 짱개를 이기면 기분이 좋아짐

[신고하기]

댓글(18)

1 2

이전글 목록 다음글

1 2 34 5
제목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