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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테로.. | 19/06/21 04:18 | 추천 34

마약으로 망하고,마약으로 일어난 나라.중국 (1편) +779 [43]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180341480






 





아편(鴉片, opium)

양귀비꽃에서 추출한 물질로

고대로부터 내려온 진통제이자 마약이다.

5천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양귀비꽃을 재배했으며


약 3천년 전 유럽과 아프리카,중동과 인도까지 퍼져나갔다.






일찍이 중국인들은 아편을 알았으며

진통제이자 건강 식품이라 여겼으나

아편 소비량이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초 가경제 후반부터였다.



(백련교 여장군 왕총아)





당시 청나라는 건륭제의 사치와 화신의 부패,잇다른 자연재해가 겹쳐 

삼번의 난 이후 비교적 평화롭던 대륙이 불안정해져

건륭 말년(1796),청나라에 널리 퍼져 있던 백련교 신자들이 9년에 걸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를 백련교도의 난이라 부른다.





(청 인종 가경제)





한때 4개 성까지 번졌던 반란은 9년이 지나서 진압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청나라는 엄청난 재정 손실과 더불어 심각한 부패까지 체감했는데

보다 못한 가경제는 그 당시 청나라 최대 권신이자 희대의 부패한 정치가였던 화신을 죽여 부패를 좀 진정시키려 했으나

이미 본인부터 죽은 화신의 재산을 착복한 데다 건륭제 이후 뿌리깊은 부정부패는 화신 하나로 고쳐질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는 그나마 막대한 무역 흑자로 다른 나라들이 보기엔 나름 강성한 것 처럼 보였는데

이 당시 대표적인 효자 상품은 차였다.

대표적인 차 수입국인 영국은 매년 28000톤의 은을 차 수입으로 청나라에 지불했을 정도였는데

반대로 영국은 청나라에 내다 팔 상품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나마 수요가 있던 무굴산 면화 역시 청나라 경제 침체로 수요가 끊겨서

영국은 청나라에 엄청난 손해를 보는 형편이 되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무역 적자를 흑자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무굴 제국의 아편 뿐이었다.





1822년(도광 2년) 당시 청나라의 아편 수입량은 347상자에 불과했으나

1835년(도광 15년)엔 4배가 넘는 1390상자로 늘어났으며

1839년(도광 19년,제 1차 아편전쟁 발발 1년 전)엔 8배 가까이인 2553상자로 늘어났다.

거기다 이것도 정식 수입이며,밀수는 얼마나 될 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 규모이다.



(청 선종 도광제)




가경제 이후 도광제 시기에 이르면 고위 관료들 중 10~20%는 아편 중독자가 되어 있었으며,

하위 관료들 중 80~90%는 아편 중독자가 되어 있었으니,

심지어는 도광제 본인조차 아편을 피웠을 정도였다.

그나마 도광제는 아편은 피웠을지언정 정신까지 이상해지진 않아

청의 심각한 무역 적자와 아편의 해악성을 모르지 않았다.

도광 16년(1836년),도광제는 아편의 합법화에 관하여 대신들과 회의한 뒤

회의 결과는 아편 불법화였으며 아편 단속 강화에 나섰다.

더불어 도광제 본인조차 즐겨 피던 아편을 단번에 끊어 버렸다고 하니

청나라의 아편에 대한 단속 의지는 엄청난 것이었다.







청 흠차대신 임칙서(林則徐)




도광 19년(1839년),임칙서는 광주에 도착해 영국 상인들과 협상을 벌였는데

순순히 아편을 내놓을 시 아편 1상자당 차 5근으로 교환해 줄 것이나,

몰래 빼돌려 밀매할 시 영국인이어도 사형에 처할 것이란 엄포를 내렸다.

처음엔 영국 상인들도 단순한 공갈인 줄 알고 체면치레로 1000상자 정도만 내놓았으나

화가 난 임칙서가 영국 공사관과 광주,마카오의 영국 상인들에게 식량과 식수 공급을 중단하자 2만 상자를 추가로 내놓았다.

그리고 임칙서는 압수한 아편을 석회와 섞어 폐기시킨 후,바다에 흘려보냈다.

덤으로 미국 상인들마저 아편 무역을 포기할 정도로 임칙서의 위상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여기까진 좋았으나,영국 상인들이 본국에 알리는 순간 일이 크게 틀어지는데,




영국 상인 대표이자 화물 수송 책임자였던 찰스 엘리엇
 



당시 영국은 청나라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편으로 겨우 무역 적자를 만회하던 차에 이런 불상사까지 발생한 터라

중국에 대한 강경론이 적지 않은 상태였다.









파머스톤 자작 헨리 존 템플,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윌리엄 글래드스턴


현직 총리 헨리 존 템플과 전직 총리 아서 웰즐리가 대청 강경론자이자 전쟁 찬성론자여서 일단 전쟁 가결이 우세할 듯 싶었으나

영국의 행태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목소리 또한 적지 않았으니

훗날 총리가 되는 정치 신인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대표적이었다.

 

 

여기서 찬성파,반대파 모두 영국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니
 

찬성파는 영국의 위신,

반대파는 영국의 도덕성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서로에 대한 정중하면서도 날카로운 공격이 이어졌으며 


치열한 논쟁이 오고 간 끝에 영국 국회는 9표 차이로 청나라에 대한 보복 전쟁을 승인했으니






 



역사상 제일 더러운 전쟁이라 불리는 제 1차 아편전쟁(1840~1842)의 시작이었다.












3줄요약

1.청나라 망조들었는데

2.영국한테 아편 피우기 싫다 그러다가 좆됨

3.다음 편 언제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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