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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겐새끼.. | 19/07/20 13:35 | 추천 24

한강교 폭파당시 몇명이 죽었을까? feat 뇌피셜 +424 [12]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186150366

한강교를 폭파해서 피난민 수천명을 학살했다?

 

한강교 폭파 희생자는 과연 누구이고 몇명일까?
좌좀 개새끼들은 아무말 대잔치로 최대 수천명까지 주장하고 피해자 신원도 다수의 민간인들이 피난가는 다리를 폭파했다고 개 씹같은 선동을 한다.  밝혀진 사실로만 이야기 하면 서울시 경찰서 직원들 77명이 전부다.

 

출처 - 한국전쟁과 전후 민간인학살 사건을 중심으로 - 신기철

다수의 목격자들이 증언한 민간인 복장을 피해자들 역시도 경찰서 직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한 이유가 있다. 우선 인터넷에서 좌좀 개새끼들이 한강교 폭파된 사진들중 수차례 폭격으로 완전히 걸레짝이 된 한강 인도교 사진을 가지고 선동을 한다.

 

▽미군의 폭격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된 이후의 한강 인도교 



"피난민들과 군경이 밀집한 상황에서 이승만이 다리를 끊어서 수천명을 죽였다"
라는 식의 좌좀 특유의 선동정보를 양산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최초 폭파는 현재 노들섬 남단지역에서 시작되는 상판 두개만 날라갔을 뿐이다. 그 증거로서 1950년 7월 8일 미군이 실시한 한강철교 폭격사진을 보면 알수가 있다. 

 

▼1950년 7월 8일 한강 철교폭격 사진 우측 인도교 




▼이후 인도교까지 추가로 폭격하여 남단 상판하나를 더 폭파를 했다. 


 

당시 한강교는 27일 오후 한강교 폭파지침이 하달된 이후부터 통제를 했고 헌병대와 공병대가 관리를 했으며 민간인들은 교량을 이용할수 없었다.  1917년 한강인도교의 폭은 현재와 다르게 좁았다. 이후 여러차례 개보수를 해왔고 아치교 형태는 1936년에 폭이 확장되어 만들어졌으며 전후 1958년에 완전 복구가 되었다. 

 

▼1917년 완공 당시 한강 인도교는 교량폭이 크지 않았다.




 

▼한국전 당시 폭파된 한강교 폭을 가늠할수 있는 정면사진 (아치 바깥쪽이 인도)

 

폭파당시 피해자들에 대한 증언

목격자와 증언을 종합해 보면 좌좀들의 주장이 상상에 기반한 소설임을 알수가 있다. 증언자들의 당시 회고를 보면서 당시 상황을 이해할수 있는 정보들이 담겨 있음을 알수가 있다. 

 

김홍도씨(당시 시경경비계 주임).

『나는 그날밤 시경 경비계 당직 주임이었는데 새벽 5시쯤에 김태선 국장이 전경찰에 긴급 비상을 걸라는 전화명령이 왔어요.소집되는 대로 경감급을 대대장으로 경찰 전투부대를 3개대대 편성했습니다.

 

1개대대는 3백50명정도였지요. 이 부대를 의정부 태능쪽에 투입했지만 적의 압도적

화력앞에 분산 후퇴했어요. 27일 저녁 7시쯤에 사태가 긴박해져 경찰도 일단 후퇴명령을 내렸다가 미군 참전소식에 김 국장이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했습니다.

 

이때 채병덕장군이 중앙청 쪽으로 지프를 타고 달리면서 후퇴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젓고 갔습니다. 그러나 새벽 1시쯤 경비계장 김병두경감과 함께 졸고 있는데 남산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들려오고 사무실에는 경찰간부도 별로 없었어요.

 

나는 「드리쿼터」를 타고 김병두경감은 지프로 한강으로 달렸지요. 내 바로 앞에 김태선 국장의 차가 있었는데 한 육군대위가 강을 못건너게 막아요. 국장차인데 왜 통과시키지 않느냐」고 항의하여 겨우 다리를 건넜습니다. 막 건너온 순간「쾅」소리와 함께 내가 탄「드리쿼터」의 뒷부분이 공중에 떴고, 소방과장 신인우총경이 탄 지프유리창이 박살이 났지오. 또한 이때 종로경찰서원들이 타고 건넌 트럭이 하늘로 붕뜨면서 짐짝처럼 경찰관들이 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졌구요. 정말 악몽이었습니다.』

 

최병용씨(당시 성북서장).

『27일 하오 7시 사태가 긴박해지자 국장실에 다시 관할 서장회를 열고 토의했으나 어떤 결론은 얻지 못하고 "사태가 아주 위급해지면 성북서는 동대문서로, 동대문은 종로서로, 종로는 영등포서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해산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적 탱크가 수유리 지서에 들어와 있었고 이응준 소장의 제5사단과 이형근준장의 제2사단 일부병력이 미아리 고개에서 전투를 준비중이었습니다. 서에 돌아와 관내 시민에게 피난하도록 가두방송을 하고 유치장에 있던 죄수를 석방했습니다.

 

밤 8시쯤 돈암교「로터리」에서 지도를 가지고 작전계획을 짜고 있던 이용문대령(비행기 사고로 순직)을 만나 함께 본서로 와서 본부를 세웠지요. 10시30분쯤 서 옆에 사시던 조병옥박사가 서장실에 들러 어떻게 됐느냐고 묻고는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밤 11시에 15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내방으로 맥주 2상자, 사과 2상자를 가지고 위문하러 왔어요. 그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28일 새벽 1시30분쯤 적의 다발총 소리가 들려 이 대령과 전 서원을 철수시켰습니다.  나는 지프로 신설동으로 해서 종로4가로 가다가 적 탱크가 있는 것을 보고 우회, 시경에 가서 사태의 위급을 알렸지요.』.

 

『나는 다른 것은 그만두고, 아주 슬픈 회고를 하나 하겠어요. 종로서는 일부 서원으로 경무대를 중심으로 삼청공원 뒷산과 창의문 근방에 비상배치를 했어요. 28일밤 1시쯤에 채영식서장 명령으로 유치인들을 내주고 전 서원과 후퇴를 했지요.

 

내 지프에는 10여명의 서원이 매달려 탔는데 처음에는 헌병제지로 강을 못 건너다가 옆길로 빠져 겨우 도강을 했지요. 노량진 사육신묘 앞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는 폭음을 들었어요. 처음에는 북괴병들이 추격, 도강해서 다리를 끊은 줄 알았어요. 수원에 가 서원 점호를 해보니 20여명을 태운 우리 서「트럭」이 간데온데가 없어요. 결국 다리 폭파때 희생이 된 거지요. 서장이하 모두 부등켜안고 울었습니다.』

 

▼중앙일보 - 민족의 증언 가장 길었던 3일 

서울시 전체경찰은 27일 하오부터는 거의 기능이 마비되어 조직적 행동이 불가능했다. 특히 후퇴때의 혼난은 극심했다. 일단 후퇴결정을 했다가 다시 번복했는가 하면 최병용 성북서장이 적탱크를 보고 달려와서야, 김태선 국장을 비롯한 시경 간부가 당황하여 도강을 서둘렀다. 이 통에 최운하 부국장은 다리위에서 폭사의 참변을 당했다. 또한 시경간부들이 철수하기 전에 독단으로 한강 다리를 건넌 일부서도 있었다.

 

한편 적침에 직면하여 그 당시에는 무리였는지 모르지만, 군경의 협조가 순조롭지 못했다는 것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여기 나온 경찰증언의 말을 종합해 보면, 군은 시경에 어떤 협조나 지원도 요청치 않았음을 알수 있다.

 

또한 시경국장의 차를 한 육군대위가 제지한 것이나 경기도 장단서원들이 서대문쪽으로 후퇴해 들어오다가 역시 군의 제지로 수색으로 퇴로를 돌린 것등은 군경이 혼연일체가 되지 못했다는 단적인 예라하겠다. 군은 한강다리를 끊는다는 것을 사전에 어느 경찰고관에게도 알리지 않았었다.

 

다수의 자료를 취합해보면 당시 한강교는 통제상황이였고 경찰병력이 차량으로 철수중에  한강교가 폭파되어 다수의 경찰직원들이 희생되었다 이중 밝혀진 인원수가 77명이다.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또 수천명이 희생되었다는 근거가 매우매우 희박하다 

 

사형당한 최창식 공병감의 법정진술 

또한 한강교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는 상황에서 폭파를 했다면 최창식 공병감은 그 책임을지을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최창식 공병감의 법정진술에도 민간인 이동은 없었다. 

 

법정진술 - 출처(중앙일보 민족의 증언) 

▲재판장=그래서 즉시 폭파했는가?

▲최대령=아니다. 폭파 명령을 받고 현장에 가보니, 아군의 차량이 계속 도하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득이 약 40분간을 기다렸다가 완전히 도하했다고 판단했을 때 점화지시를 내렸다.

 

▲재판장=아군부대가 후퇴하기전에 교량을 파괴한 관계로 막대한 병원과 장비가 손실됐다.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최대령=그 당시 교량을 파괴하지 않았으면 적 전차가 도강하여 시흥까지 내려왔을 것이다.

 

▲재판장=증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북한강 파출소쪽에는 다수의 차량이 밀려있었으며몇대가 다리위에 있었는데 이들을 도강시킨 다음 점화했어도 되지 않았겠는가?

▲최대령=그 당시 본인은 남한강파출소에 있었고, 비가 내리며 칠흑같은 암야인 관계로 이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내가 참모총장의 명령을 받고, 현장에 이르렀을 때에는 다수의 차량이 줄지어 통과하고 있는데  이들을 다 통과시킨 후 중단된 틈을 타서 점화했다.

 

▲재판장=28일상오 2시 현재 시내에 침입한 적 탱크는 2대뿐이었다.몇시간 기다렸다가 폭파해도 무방하지 않았는가?

▲최대령= 채총장의 명령은 적 탱크가 시내에 침입하면 즉시 폭파하라는 것이었다.따라서 나에게는 아무런 재량권도 없다.

 

▲재판장=폭파 당시 한강북안에 있는 아군의 후퇴상황을 파악하지 않은데 대해 귀관의 책임이 없단 말인가?

▲최대령=아까도 말한바와 같이 비가 쏟아지고 암야인데다가 등화관제가 되어 한강 북안의 전반적인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북한강파출소 근처에는 차량들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

 

한강교 폭파 시점에서의 통제상황 

▼(국가수호 사적지 폭파당시의 상황설명부분)

http://sajeok.i815.or.kr/i815/view_edu?idx=108 

그러나 6월 27일 17시에 적의 전차가 길음교 전방에서 나타나고, 이어서 다시 시작된 적의 공격으로 서울 방어를 위한 마지막 저지선이 붕괴되자 채 총참모장은 23시 30분 육군 본부의 1차 철수 때와 같이 전방 부대와 재경 부대, 그리고 시민들의 철수를 고려하지 않은 채 한강교 폭파 준비를 명령하였다.

28일 오전 1시 45분에 채 총참모장은 돈암동에서 급히 도착한 강문봉 대령으로부터 적의 전차가 시내에 침입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지금 적전차가 시내로 들어와 돈암동을 지나서 동소문으로 향하고 있다. 이미 배치한 전차 공격조는 그대로 두고 즉시 한강으로 가서 한강교를 폭파하라. 나는 이제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간다. 곧 실시하라.” 채 총참모장은 육군 본부를 나와 한강을 건너 영등포로 향하였다.

총참모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공병감은 한강 폭파 지휘소로 가서 공병 학교장에게 한강교 폭파를 명령하였다. 이때가 28일 오전 2시 20분이었다. 공병 학교장은 한강인도교 북쪽으로 공병을 보내 도강하는 차량과 인파를 제지하게 하고 각 교량 폭파 책임 장교에게 교량 폭파를 명령하였다. 당시 이곳 북한강 파출소에는 헌병들이 배치되어 명령 없이 철수하는 차량들을 제지하고 있었으나 밀어닥치는 차량과 인파로 큰 혼란을 빚고 있었다.

이즈음 이시영 부통령의 도강을 끝으로 차량 통행이 완전 제지하였다. 공병학교장의 폭파 명령은 사전에 정한 칼빈 소총의 연발 사격과 손전등의 수신호로 하달되었다. 이로써 각 교량의 책임 장교가 각각의 도화선에 점화하여 교량이 절단되었
다.
 

그래서 결국 몇명이 희생되었는데?

폭파된 상판 2개에서 수천명의 희생자가 나올수 있을까? 흙수저 틀딱이고 누구마냥 중졸이라 과학적 추론을 할수가 없으니 눈대중(DJ)으로 할수 밖에 없는데  마침 대한민국 국군이라면 죽도록 빨아줘야할 밴플리트 장군님께서 임시복구 개통식에 참석한 사진이 있는데 이걸로 대충 가늠할수 있지 않을까?


두개의 상판위에 꽉꽉 채워 넣으면 수천명을 집어넣으면 가능할지 모르나 한강교 폭파 당시 야밤에 비가오고 있었고 노들섬(당시 중지도) 지역에서부터 통제상황이였고 도보가 아닌 차량 이동중이였으며 상판 두개만이 폭파되었고 등화관제 상항이였며 자료와 다수의 증언을 취합해서 추론해 봤을때 민간인 사망자는 없고 차량 이동중이던 군경 200여명이 최소가 아닌 최대치라고 판단을 한다.   

 

▼1951년 6월 62공병대 한강 인도교 재건 기념식  


▼1958년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 기념식 

 


 


 한줄요약 - 좌좀새끼들은 늘 아무말 대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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