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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지기 | 24/05/14 14:14 | 추천 23 | 조회 37

사학과 대학원)1. 고려의 건국 과정 +37 [6]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6051057

아까 글 올린 사학과 대학원생. 교수님 허락과 검수 하에 유게에 고려사를 연재하게 되었읍니다.

교수님이나 제 스케줄이 다 고정된건 아니라 시간은 왔다갔다 하겠지만, 항상 전 글 링크는 박아둘게요.

그런 의미에서 일단 인사부터 박고.




새로 글 쓰는 걸 감안해서, 일단 고려 건국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혹시 예전에 썼던 글 모음 필요하신 분은 작성글에 한국사)치면 우르르 나올겁니다.

그리고 이 글은 『고려사』『고려사절요』, 그리고 박용운 선생님의 『고려시대사』를 기반으로 쓰는 개론 이하의 글입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고려사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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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왜 망했나요? 부터 시작해야겠네요.

신라 말기는 말 그대로 군웅할거, 혼란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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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통치력 약화와 그로 인해 일어나는 민중 수탈,

그리고 원종과 애노의 난을 비롯한 민중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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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로 대표되는 지방 군진세력의 성장과 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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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킹 수준으로 혼란스러워진 신라 왕실 내부와 골품제까지.

신라 말기는 말 그대로 혼란기, 군웅할거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대상을 바탕으로 성장한 세력이, 우리가 한국사 교과서에서 흔히 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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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이었습니다. 이들 호족은 각자의 방법으로 세력을 구축해 나간 지방세력을 의미합니다.

지도에 적힌 바와 같이, 신라 말기에는 각 지방의 호족들이 성장, 스스로의 독립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호족 세력들 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드러낸 두 인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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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와 견훤, 이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각각 후고구려(태봉), 후백제를 건국, 각 지방의 중소호족들을 흡수하며 그 세력을 불려갔습니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고려사』권1 태조세가 총서의 기록을 인용하겠습니다.


- 그 때 신라(新羅)의 정사(政事)가 쇠퇴하여 도적떼가 다투어 일어났다.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남쪽 고을에 의지해 후백제(後百濟)라 일컬었고, 궁예(弓裔)는 고구려의 땅에 의지해 철원(鐵圓)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

자연스럽게 신라의 세력은 굉장히 약화되었죠.

그리고 이들 지방 군벌 세력들은 각각 한반도 세력을 통일하기 위해 끝없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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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고려사에서 주목할만한 인물이 고려의 태조 왕건입니다.

먼저 태조의 출신부터 살펴보도록 해야겠네요.

태조의 출생 신화도 있지만 그건 다음에 다루도록 하고, 현실적인 기록을 중심으로 하겠습니다.

태조 왕건은 아버지 왕륭과 함께 송악, 지금의 개성의 지방 호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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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왕건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에게 귀부하여 궁예의 측근 장수로써 활동하게 됩니다.

왕건은 궁예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워 총애받은 장수가 되었는데, 고려사 태조 총서에서 궁예의 측근 of 측근이었다는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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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왕건의 가장 큰 공 중 하나는 수군을 통해 후백제의 뒤통수인 나주를 점령한 것이었습니다.

지도를 보시다시피 왕건은 수군을 통해 후백제의 뒤인 나주를 점령하여 후삼국 체제에서 후고구려가 굉장히 유리한 위치에 자리잡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시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태조는〉 정주(貞州)의 포구로 가서 전함 70여 척을 수리하여 병사 2,000인을 싣고 나주(羅州)에 이르니, 백제(百濟, 후백제)와 해상 초적[草竊]이 태조가 다시 온 것을 알고 모두 두려워하여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태조가 돌아와 배를 움직이는 이로움과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을 보고하자, 궁예는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왕건과〉 견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


아무튼 이렇게만 흘러가면 후고구려가 당연히 삼국을 통일했겠지만, 그랬으면 제가 고려사가 아니라 태봉사를 적고 있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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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즈음, 궁예의 정치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나중에 다음 글에서 이어 쓰겠습니다.

이 글은 예고편이라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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