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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 | 24/08/16 18:23 | 추천 28 | 조회 6

괴담) 이누나키 터널 괴담은 사실 강제징용의 결과다? +6 [15]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7266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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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이누나키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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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공문서와 지도에서는 완전히 말소되었지만 실제로는 해당 위치에 마을이 존재한다.
마을의 입구에는 "여기서부터 일본국 헌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에도 시대 이전부터 격렬한 차별을 받아왔기에, 마을 사람들은 외부와의 접촉을 모두 끊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한다.
닫힌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내부인은 근친혼을 반복했으며, 다들 유전병에 걸려 매우 위험한 사람들이 많다.
입구로부터 조금 안쪽에는 마을 광장이 있고, 그곳엔 너덜너덜하게 고물이 된 세단이 1대 놓여 있다(상단 사진의 것으로 보인다).
또 그 앞에 있는 오두막 안에는 해골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구(舊) 이누나키 터널 안에는 방책이 있고, 이것을 넘으면 끈과 캔을 엮어 만든 경보 장치가 있는데, 이것에 걸릴 경우 큰 소리가 울리며 직후 비정상적으로 빠른 속도로 도끼를 든 마을 사람이 달려온다.
이누나키 마을 근처에서는 모든 메이커의 휴대전화가 권외가 되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지며, 그나마 근방에 있는 편의점의 공중전화는 110번(한국의 112)이 통하지 않는다.
젊은 커플이 장난으로 이누나키 마을에 갔다가 시체로 발견되었다."



일본의 유명한 이누나키 마을 괴담이 있죠.


이 괴담은 너무 유명해서, 나무위키에도 당연한 듯이 있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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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게시글.

한국계라는 괴담이 국내에서 도는 와전된 내용이라고 보통 이야기하는 중인데요,



문제는 이 괴담, 한국인들이 원인이 아닌가에 대한 지적은 한국에서 생긴 게 아닙니다.



이 괴담의 역사를 좀 따라가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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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이누나키 터널 형 괴담이 등장한 장소입니다.


1999년의 2ch(지금의 5ch)에서, 닛테레(일본 텔레비전)의 독자투고 게시판을 인용한 부분이에요.




 의뢰주 익명희망
타이틀 『일본에 있는 일본이 아닌 마을』

의뢰 내용

후쿠오카현에서 이누나미 고개라는 현지에서는 매우 유명한 심령 명소가 있습니다.
저는 심령의 종류는 전혀 믿지 않습니다만, 이 지역은 아무래도 심령인 것을 빼놓고 매우 이상한 장소인 것 같습니다.

이누나키 고개의, 어느 터널 옆에 보통으로는 절대 간과해 버리는 같은 도로가 있습니다. 그 기도를 오르면 점점 길은 좁아집니다. 그래도 올라가면 무려 지도에 실려 있지 않은 마을이 있습니다. 기도의 도중에는 「앞으로, 일본국 헌법 통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취지의 세워 지폐도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밤 이 마을에 가려는 아는 사람은 마을 입구 (?)에 조립식 오두막을 발견했습니다. 문득 차를 멈추고 그 조립식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4, 5명의 남자가 모여 있어, 소위 예리한(이었다)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굉장한 속도로 차에 가까워져, 「이것은 위험하다!! 그렇습니다만, 차의 뒤 부분은, 도끼와 같은 것으로 엉망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낮에 마을에 갔던 다른 아는 사람은, 낮에는 마을에는 아무도 없고, 너덜너덜 나무
로 문을 칠 수 있었던 집이 몇개 있어, 광장(?)과 같은 열린 장소 에 시마네 넘버의 하얀 차가 굉장히 되어 방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전, 이 지역에서 시마네의 커플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상하게도 그 주변에서는, 어느 메이커의 휴대 전화도 권외가 된다고 하는 이상한 현상도 일어납니다(나도 그랬습니다.).

또, 미확인입니다만, 거기에서 가장 가까운 모 편의점의 공중 전화는 110번이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들었습니다만 이 마을은 경찰이나 국가 권력의 개입을 할 수 없는 「특별 어떻게든 보호(?) 지역」이라고 합니다.

확실히, 현지에서는 매우 유명한 장소에 관계없이, TV등의 취재도 왠지 고개 막혀입니다.

일설에는, 이 마을은 에도 시대 이전 매우 심한 차별을 받고 있어 언젠가 외계와의 접촉을 일단 절단해, 그 마을만으로 자급 자족해,

또 여성의 절대수가 적기 때문에 근친 상간을 반복해, 유전적 에 위험한 사람이 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단순한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시라도 빠른 조사를 부탁드립니다.
최근 흥미 절반으로 이 지역에 가는 젊은이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진행 상황 미조사




인터넷 여명기, 그것도 1999년의 기록이고,

이것보다 빠른 서적 기록은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기 떄문에 사실상 최초의 기록으로 추정되는데요.


일단 보통 이누나키 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 어디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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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이누나키 댐에 수몰된 지역에 있던 마을,


그리고 이누나키 댐 북쪽에 존재하던 화전민 마을(이누나키야마무라) 이 둘이긴 합니다.


근데 도시전설에서는 적어도 아래 마을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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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부분 관련해서는 일본 쪽에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지도에 없는 아리랑 고개 - 강제연행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 하야시 에이다이, 1994.

저는 이 책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한 웹사이트는 많으니까요.







“치쿠호의 탄광지대에는 몇 가지 지옥 골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그러한 지옥 골짜기는 아리랑 부락이 있다.
나중에 탄광에서 쫓겨나 귀국도 못했던 조선인이 모여 슬램화한 것이다.


고시다 탄광터는이즈카시의 고시다 초등학교의 동방에 있고, 거기에 고바다 탄광비가 있어, 길가에는 미쓰비시 마크의 더미가 쳐지고 있다.

 이 사쿠라에서 오모에 맞서 미쓰비시 전용의 선로가 그려져 있었다. 고시다 코 근처에는 조선인의 수용지가 있었다. 오모에도 조선인 마을이 있었고,

작은 구릉지는 '아리랑 고개'라고 불렸다.


--------

(이하는 관련 일본인 연구자료 모음입니다)


 후생성 근로국 조사 명부(1946년)의 후쿠오카현 분사료 속에 사바다 탄광분 명부가 있다. 여기에는 3051인분의 이름과 출신지가 적혀 있다.

이 명부는 제3항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시모카모생의 제5갱분은 결락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40년 11월 고성군에서 연행된 정정모씨의 이름은 여기에 없다(바야시 에다이 『조선해협』에 연행 경과가 적혀 있다).

연행 상황에서 봐서 사바다로의 연행자 수는 400명을 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명부에서 죽은 자명을 벗어나 뒤에 쓰는 추도당 ‘무궁화당’에 담긴 유골명과 대조했는데 몇몇 연락처가 밝혀졌다.

2001년 4월, 추도당 건설을 진행해 온 裵?善씨가 도한해, 고문 케이 병씨의 유족의 문복례씨와 면회, 칠월에는 유골을 인수해 문씨가 현지 를 방문했다.

아버지를 잃고 '피의 눈물'이 나올 생각을 했다는 분씨가 유골 앞에서 慟哭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지금도 과거의 청산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2003년에는 미쓰비시 고다타 탄광으로 사망한 김장성씨의 유족이 유골을 잡았다.

 고시다의 비에 연행에 대한 설명문은 없고, 여기에 연행된 사람들의 기억을 거부하는 것 같다.

 야마다시의 사이조지에는, 1968년의 미쓰비시 카미야마다 탄광 폐산 때에 들려온 65체의 조선인의 유골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한국으로 송환됐다고 한다. 65명의 이름은 알지만, 사망년이나 주소에 대해서는 불명하다. 조선인 수용소의 하나는 후지 기숙사라고 불렸다.

 타가와군 방성초에 있던 미쓰비시 방성탄 광적에도 비가 있다.

방성 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은 야쿠사 기숙사, 야마토 기숙사, 금강 기숙사, 흥아 기숙사 등에 수용되었다(시바 타케오 '탄갱과 강제 연행').



 방성초교위의 '방성 카타베'에 의하면 탄광자로서 공무공작실, 인입장, 권장 등의 건물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방성탄광으로 사망한 조선인을 구운 곳은 '인야키야'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방성, 우에야마다에는 각각 400명 정도의 조선인이 연행된 것으로 보인다.

치쿠호에는 미쓰비시계 탄광으로 이즈카, 고다, 방성, 신입, 우에야마다, 카츠다 등이 있으며, 각각 3~4천명의 조선인을 연행하고 있다.

1944년 1월의 이러한 치쿠호의 미쓰비시계 탄광에의 총 연행자수는 17, 105명에 달한다(후쿠오카현 특고과 “노무 동원 2열 이입 노무자 사업장별 조사표”) ).

45년까지 연행자를 더하면 2500명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쓰비시에서는 일찍부터 조선인을 '모집'하고 탄광으로 사용하고 있다. 1928년 3월에서의 조선 인원수를 보면 질전 1, 738명, 이이즈카 1, 768명, 방성 413명, 신입 944명, 우에야마다 339명 (『치쿠호 이시탄초업 사연표』), 20년대부터 ‘모집’을 벌인 조선인을 사용해 온 경험이 연행과 노무관리에 이용되어 갔다고 보여진다.


각지의 탄광에 조선인 여성이 성노예로 연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탄광자본은 조선인 관리를 위해 정부의 지시하에 '위안소' 경영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과학연구소 '반도노무자 근로상황에 관한 조사보고'에는 홋카이도의 사례가 많지만,

업자에게 시가지에서의 개업을 허가하거나 조선인 거주지의 중심에 두거나 건물을 무료로 대여 해 탄광 병원에서 검진하거나,

「예방구」를 각 기숙사에 배치해 무료 사용시키는 형태로 협력하거나, 건물을 무상으로 대여해 지정 업자에 경영시킨 경우가 기재되어 있다


 이즈카, 카모, 다가와, 오오오리에 여성들이 모여 있던 곳(“위안소”)이 있었다고 하는 증언(『지워진 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

미쓰이다가와, 미쓰비시방성, 도슈 , 후루카와, 대봉 등에도 존재한 것을 확인한 조사(『탄갱과 강제 연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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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 글에서 말하는 미츠비시 고시다 탄광터는 왼쪽 이누나키 댐에서부터 25km 떨어진 지점에 주요 유적이 있습니다만

지금 존재하는 카사시로댐 공원 인근에도 채광소가 존재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즉 이 인근에서 외국인 부락 관련 주장은 대부분 이 일제의 조선인 징용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추론이

80-90년대 일본에서는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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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iyawakahistory.jp/inuton.html


현지의 농업학교 교감 사와다 켄고가 쓴 지역사 관련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 점을 현지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듣고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군용도로이므로 모두는 현지에 내밀로 행해졌다고 하는 것. 또 산속의 작업이므로 아무도 그 건설 작업의 과정을 모르는 채로 있었습니다.

작업에는 미야다의 건설회사가 근처, 작업원으로서 한국의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었다는 것.

한국 사람들의 이이바 오두막은 현재의 이누나리 댐 아래 시미즈 폭포에 가는 도중의 점점 찢어진 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밥솥 오두막이 있던 곳은 그 단계별로 삼나무 등이 심어져 있습니다.

이 한국 사람들이 강제 연행에 의한 사람들이었는지 몰랐습니다.

또 일부 분명히 구미인이라고 아는 전쟁 포로의 사람들이

미야다의 포로 수용소(포로로 미야다의 석탄 채굴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있었다)보다 건설 작업에 왔다, 의 것입니다.


이 눈의 색이 다른 구미인은 측량 등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건설 작업에 해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터널까지의 길은 현재도 일부 현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일부는 구도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길의 공사는 다이너마이트 이외 기계다운 기계가 와키타쪽보다 반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든 중노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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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시미즈 폭포의 갈라진 곳은

이 지도에서 붉은 선(구 이누나키 터널 국도)에서 중간에 갈라지는 곳이 아닐까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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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루트를 따라서 빠져나올 경우 야나기하라라는 작은 마을 터가 존재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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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위성지도로 보면 이 부분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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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토지리원의 항공사진과 지도사진을 겹쳐 보죠.


https://maps.gsi.go.jp/#16/33.669091/130.550958/&base=std&base_grayscale=1&ls=std%7Cseamlessphoto&blend=1&disp=11&lcd=seamlessphoto&vs=c1g1j0h0k0l0u0t0z0r0s0m0f1&d=m


해당하는 마을이 꽤 많아 보이네요.


대부분은 이 언저리에 당시 일본군에 의해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의 마을이 있었고


이 근처에 다가가면 강제적으로 군대에 의해 잡혀가고

일본 헌법이 아닌 군법이 적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즉 이 모든 조건이 합쳐지면서


"일본국 헌법이 적용되지 않음"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음"

"무기를 든 사람이 쫓아옴"이란 전설이 생긴 게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이 전설이 각지에 더 있는 것은

이런 형태의 군용 터널 작업지들에서 공통적으로 있던 대규모 강제징용의 결과라

비슷한 데가 워낙 많았던 게 아니냐는 설도 있어요.






여기서 한가지 더 주목할 점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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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나키 댐이 생기기 전의 1960년대 항공사진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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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상으로는 마을이 "존재한 적 없던 장소"에 흰 색으로 빛나는 개척지가 존재합니다.




일본은 90년대 말 전국조사가 이뤄지기 전까지

그리고 2020년대 지금에도 80년대까지 존재했던 국가에 의해 파악되지 않았던 개척마을들이


알려진 것만 수백 개, 알려지지 않은 것도 백수십 개 있는 것으로 추정하거든요.


이러한 개척마을이 이 전설을 90년대까지 살아숨쉬게 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국내 일부 주장과 다르게 이 주장은 일본에서 먼저 제기되었다는 점

그리고 여러 정황증거가 해당 내용을 보강하고 있다는 점


그러고도 아직까지는 설로 그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실 어제 써야 했던 건데 남궁루리배 중계 문제로 지금와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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