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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뉘다지.. | 19/08/19 04:07 | 추천 40

[정보] 항일무장투쟁은 분명히 과장왜곡되었음. 증거는 여기 있음. +250 [8]

원문링크 https://www.ilbe.com/11192858987

 
이런 글이 유튜브나 다른 인터넷 공간에 별로 없다는게 거시기 해서 올려본다.

항일무장투쟁운동은 후일담을 그럴듯하게 재구성한 픽션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왔어.
그것도 교과서는 물론 각종 미디어에서 상상력과 카더라가 가미된 수십년간 재생산되어 왔음.
그 결과 일종의 "유사역사서"가 한국사람들 머리가 속에 꽈 박혀 버렸지.

그나마 반일종족주의가 물꼬를 트면서 당시의 진실에 대해서 한두마디 반론을 입에 담을 수 있게 되었음.
그리고 사실 잘 찾아보면 무장항일군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깨알같이 많음.

이를테면 

"박정희는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했다."
"울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왜놈들 때려잡다가 해방 후 귀국하셨다."
"울 할아버지는 **선생의 비밀요원이었다."
"윤동주는 일제의 생체실험으로 해방 직전 옥중에서 죽었다."

좌좀들이 베충이는 친일파 운운 선동할까봐 강조하지만 일제가 잘했다거나 항일운동이 전혀 없었다는게 아님.
다만 우리 머릿속에 막연하게 그려지는 항일무장투쟁은 말 그대로 픽션이라는 것임.
선동과 왜곡과 과장으로 만들어진 유사역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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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오동, 청산리 전투-항일독립군의 무력은 0에 가까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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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항일독립군 최대의 전과라는 청산리대첩(?), 봉오동대첩(?). 
이 두 전투는 임시정부의 존재감이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 중 하나였음.

하지만 실제로는 사살당한 일본군은 10명도 채 안됨.
이 두 전투는 추후에 일본에 의해서 피해를 교차검증 했는데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음.
전투 전후의 일본군 동향을 봐도 3000여명 사살은 근거가 전혀 없음.
다만 봉오동의 경우 일본군간의 팀킬이 있었다는 정황은 있음.

청산리전투 일본군 사살 3000여명의 근거라는게 당시 상해임시정부의 찌라시였던 독립신문 기사임.
전과를 축소하고 과장하는 것은 전쟁 당사자간 흔한 일상이기는 하나 이 두 전투에 대한 한국의 주장은 완벽한 환타지임.

그리고 이후 자유시 참변, 일본군의 색출작전과 함께 만주일대에 존재했던 대한독립군은 소멸되었음.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경력이라는 보천보 역시 마찬가지. 김일성은 아예 참여도 안했음.


2.  김학철의 비판

동시대를 살아온 이의 증언이 없는 것은 아님. 바로 김학철.
이 양반은 생전에 항일무장독립운동의 과장과 왜곡에 대해서 거침없이 비판했고
이에 대해서 조정래류 좌파문인들이나 좌파학자들은 셧더마우스.
그럴 수 밖에 없지.

김학철이 누구냐고? ㅋㅋㅋ 1916년 함경도생으로 부유한 누룩제조업자의 아들로서 서울보성학교 졸업한 나름 엘리트.
이후 무장독립투쟁을 동경하여 (본인 말로는 제2의 윤봉길) 상해의 임정 산하 무장독립단체에 건넘감.
이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중국군에 입대. 그러다가 일본군에 붙잡혀서 나가사키에서 포로생활까지 함.
부상이 도져서 수용소 생활 중 다리 하나를 절단함.
해방 후 일시 서울귀국했다가 김일성체제를 동경해서 월북....다시 중국으로 넘어가서 연변에 정착함.
이후 모택동 문혁을 비판하다가 10년 동안 감옥생활. 경력상 흠 잡을데 없는 진성 독립군임.

김학철은 중국 정착 후 조선족 문인으로서 활동을 하면서 수필이나 소설을 통해서 자신이 경험한 독립군시절을 재현하려고 했음.
특히 독립운동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이나 왜곡을 가혹하게 비판했음.
심지어 일본의 만행이라고 전해지는 것들 중 잘못된 것이라면 가차없이 바로 잡았음.
개인적 결벽성도 있지만 사회주의-과학적 유물론 사관에 충실했기 때문임.
즉 평생 팩트가 아닌 관념이나 허위를 철저히 가리려고 했음.


3. 봉오동/청산리, 윤동주

김학철은 격정시대(소설) 우렁이 속 같은 세상(수필) 속에 문혁, 상해임정, 중국군시절을 기록에 남겼음.

다음은 참여연대와의 2001년 인터뷰 내용임.
85세로 죽기 직전이었는데 이 인터뷰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함. 
https://www.peoplepower21.org/Magazine/712703

봉오동 청산리전투는 명백한 과장이라는 것임.
어쩌다 서너명 일본군을 죽이면 엄청난 전과로 (그리고 엄청난 보복) 받아들여졌다는 것임.
그리고 독립군은 군이라기 보다 중국군에 부속된 일개 무장단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힘.
보급도 훈련도 직제도 없었다는 것임. 

윤동주의 사망에 관해서도 이렇게 이야기 했음. 흔히 일본의 생체실험으로 죽었다고 떠들어 대는데 사실이 아님.
일본은 본토에 미군이 침공하는 순간까지도 정치범을 한사람도 건드리지 않았고 (패전 직전 주요 포로학살함.) 
윤동주는 잡범 축에도 못끼는데 왜 먼저 죽였겠냐고 반문함.
일본사법체계는 식민지 시절 내내 대단히 공정하고 수준이 높았다고 오히려 일본을 비호함.

(김학철은 나가사키 수용소 시절 일본수용소측의 치료부족으로 다리를 잘라야 했음.)


4.  왜정 시대 만주에는 진짜 독립군들만 있었나? (김영희의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 중에서)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pn=0&num=51151
90년대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종이공예예술가 김영희 책에 실린 내용임.
김영희의 아버지는 김학철처럼 독립투쟁을 동경해서 중국으로 건너가서 만주, 상해의 독립군에 가담했음.
그런데 당시를 회고하면서 딸인 김영희에게 독립운동가들의 민낯을 그대로 폭로하는데 그 내용이 ㅎㄷㄷ.
김학철과 일치함.

-여러 계파간 갈려서 쌈박질
-말이 무장투쟁이지 사실상 비적떼(수탈, 강간, 유괴납치)
-동포 등쳐먹기

아래는 예문임.

아버지는 잘 알려진 몇몇 독립운동가도 존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그림자를 상세히 알고 있어 오히려 실망만 한 것이다. 

"유관순 한 분만 독립운동을 제대로 했지 바지 입은 놈들 제대로 독립운동 한 것 못 봤다. 그저 제 욕심이 많아. 나라 없는 주제에 권력다툼이나 했지. 그래도 독립이 되니 제일 먼저 설치는 놈들이 그 도적 떼라니, 꾹 참고 독립을 기원한 사람들 딛고 올라가서 한 자리씩 맡아보려고...."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진짜 독립운동 한 사람들 못살아 남고 다 죽었어, 해방 후 꾀 많은 독립군들은 기회를 얻어 한자리하고 총질이나 해대던 무식한 놈들은 세상이 변한 후 총질 못해 가난하게 살고..."  


출근해야 해서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다시 올리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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